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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지역 서원 재실 탐방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102)청도를 지군사(知郡事) 지역으로 승격시킨 김한귀(金漢貴) 선생의 오산재(鰲山齋)

오산재
청도신문(2023년 9월 21일)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102)

청도를 지군사(知郡事) 지역으로 승격시킨 김한귀(金漢貴) 선생의 오산재(鰲山齋)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청도문화연구회 회원,  교장

 

  청도군 화양읍 범곡리에 자리 잡고 있는 오산재(鰲山齋)를 찾았다. 이곳의 배향 인물은 원정공(元貞公) 김한귀(金漢貴) 선생이다. 공은 청도 김씨 시조인 영헌공(英憲公) 김지대(金之岱) 6세손이며 5대조인 김선장(金善莊, 영헌공 아들)에 이어 청도의 읍격을 승격시키는 데 공이 컸다.

  고려 시대에 청도에 토착하고 있던 성씨는 신(), (), (), (), () 다섯 성씨였는데 그 중에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성씨는 청도 김씨였다. 시조인 영헌공은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등 제 관직을 거쳐 최 고위직 태부(太傅)를 제수받았으며 그 후손들 또한 중앙의 고급관료로 출사했다.

박홍갑은 청도 연혁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청도의 연혁을 구체적으로 밝혔는데 그 중 읍격 승격 부분을 요약 발췌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고려 초에 신라 대성군(大城郡)의 오악(烏岳), 형산(荊山), 소산(蘇山)의 세 현을 합하여 청도군이 되었고 밀성군에 내속되었다. 따라서 청도군의 명칭은 940(태조23)에 붙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1010(현종1) 이름을 도주(道州)로 고쳐 불렀다. 그러나 그 격이 높아졌던 것은 아니다.

  1343(충혜왕4), 상호군 김선장의 공으로 지군사(知郡事) 지역으로 승격했다. 지군사는 후일 군수에 해당하는 지방관이었는데 종전에 밀양 속현으로 감무를 파견하던 곳에서 승격된 것이다. 김선장은 충혜왕이 복위될 때 대호군의 신분으로 조적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1등 공신이 되었다. 그 뒤 충혜왕이 원나라에 압송될 때 김선장은 창에 찔리기까지 하며 저항했지만 막지 못했고 그 자신도 왕과 함께 압송되는 처지가 되었다. 그 이후 반대 세력에 의해 8살에 불과한 충혜왕의 아들 충목왕이 즉위하자 1344(충목왕1) 청도는 다시 감무 파견지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를 다시 바로 잡아 승격시킨 이는 김한귀 공이다. 고려말 우여곡절 끝에 즉위하게 된 공민왕은 친원파를 제거하는 등 개혁정치를 단행하려 했지만 홍건적 등의 침입으로 곤경에 처했는데 이때 김한귀 공이 홍건적을 물리쳐 그 공로로 1등 공신에 오산군(鰲山君)으로 봉해지고 감찰대부(監察大夫), 전라도 도순문사(都巡問使) 등을 역임했으며 청도가 까닭 없이 감무로 강등된 것을 환원시켜 지군사를 파견하게 했다. 그 때가 1366(공민왕15)이고 이때부터 조선에도 그대로 이어져 군수를 파견하는 곳으로 정착했다. 청도에서는 그 공로를 기리어 영헌공과 함께 화양읍 소재 성황사(城隍祠)’에 수호신(守護神)으로 모시고 있다.

  청도 김씨 가문에는 근세에도 순재(醇齋) 김재화(金在華, 18871964)가 군지인 속오산지(續鰲山誌)’ 정정오산지(訂正鰲山誌)’를 간행하여 청도 발전에 큰 공을 세웠다. 도학(道學)의 정통성을 고수했던 문인으로 청도지역의 수많은 재실의 기문 및 묘갈명을 쓴 분이다. 문집은 본집 23권 외집 2,  25 13책이 있다.

 

오산재란 시제로 글을 올렸다

 

청도가 강등되어 감무 파견 웬 말인가

부당함을 사뢰어 지군사를 파견하다

청도를 크게 일으킨 청도 김씨 일문이라

 

출입문
성황사 사적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