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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우댱선생/ 밀양시 청도면

우당 선생

 

                                    행전 박영환

 

   2012년 4월 1일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 우당 박융 선생의 단비에 참배를 했다.

선생은 나의 18대조이다. 그런데 선생의 산소가 실묘되어  선부 송은 선생 묘소 아래에  단비를 세워두기는 했지만 아쉬운 마음 그지 없다.

 

아무래도 마음이 아픕니다

두견새 우는 어느 골에

외롭게 계시지는 않는지요

청도와 밀양

아니 전국 곳곳 

수많은 자손들이 있건만 

모두 답답해 할 뿐입니다

이 산 저 산에 눈을 떼지 못하다가

그냥 내려옵니다

바라옵건대

청산에 붓을 드리워

웃고 지내셨으면 좋겠습니다

   

* 다음은 '한국인의 족보/ 인명대사전, 도주문화' 에 실린 선생의 행적입니다.

 

 

박 융 (朴 融) 우당 선생의 인본사상

 

   우당 박 융 선생 (憂堂 朴 融)선생은 태종, 세종조의 문인으로 자는 유명 (惟明)이며 호는 우당(憂堂)으로 송은 박 익(松隱 朴 翊)선생의 장자이며 전국 밀성박씨의 종손이다.

  일찌기 포은 정 몽주(圃隱 鄭 夢周)선생의 문인으로 1408년(태종 8년)에 생원시를 거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1411년(태종 11년)에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 에 오르고 뒤에 성균관 수찬, 전적, 전한(修撰, 典籍, 典翰)등으로 옮겼다. 호당으로 들어가 매양 첨민하였다. 다시 돌아와 이조정랑 (吏曹正郎)의 요직에 있을때 1423년(세종 5년)에 흉년을 당하여 강원도 경차관(敬差官)으로 나아가 각 군순령을 독려하여 여러 고을 백성들을 진제하였다.

  다시 1424년(세종 6년)에 경상도 도사(都事)로 나아가 권양촌(權陽村)이 지은 입학도설(入學圖說)을 다시 간행하였으며 각지방의 향교제기를 정비하고 제법을 일신하고 청도향교의 중창에 힘을 썼다.

  또한 금산군수(金山郡守)로 나아가서는 원운시(原韻詩)를 지었는데 여지승람 금산편(輿地勝覽 金山篇)에 실려있다. 1425년(세종 7년)에 다시 성균관 사예(成 均館 司藝)로 있을 때 그 전년에 경상도에 있을 때 각지방의 예속을 바로잡은 공로로서 특히 촉석루(矗石機 ) 제영(題詠) 원운(原韻)의 청을 받아 원후운(原後韻)이 백여수나 되는데 이 원운(原韻)은 현재 개축한 촉석루 정면에 걸려있다. 이후에 함안군수(咸安郡守)로 나아가서 선치 하다가 1428년(세종 10년) 3월 15일 함안 객사(咸安 客舍)에서 졸하니 전군민이 친아버지처럼 조상하였다.

  선생이 문과급제할 때 고적 (考績)에 관한 책문은 당시 많은 응시자중에서도 두드러지게 훌륭하다고 하면서 지공거 이직(知貢擧 李稷)이 선생을 장원으로 뽑아 올렸다고 하니 그것은 오늘날 민주주의의 참뜻인 민본사상(民本恩想)이 이 때부터 가장 중요시한 것으로서 그 전문이 문집에 실려 있다.

  또 1411년(태종 11년)에 선생이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으로 있을 때, 내관 황도(內官 黃稻)를 소환하고 창해도 장련(長連)의 강무장(講武場)을 폐쇄할 것을 태종대왕(太宗大王)에게 강력하게 충간 (忠諫)하였다. 그 이유인즉 "내관황도가 황해도 장련 강무장에서 개, 말을 조습(調習)한다고 사냥을 하니 황해도 백성들이 농사의 폐농이 속출하고 농민들의 원성이 높으니 이를 중지시킴이 어떠하오리까 고하였다. 그러나 무인출신이요 사냥 취미가 많은 태종 (太宗 )은 이를 즉각 중지시 킬 용기가 없었던것 같았다. 태종이 말하기를 견마의 양식은 조로써 별도 준비가 되어 있으니 농가에는 큰 피해를 입히지 않도록 할것이며 견마의 조습과 상무(尙武)의 정신은 국조이래의 일대방침이니 이를 쉼게 없앨 수 없을 것이다" 하고 반론하였다. 그러나 간관(諫官)인 선생은 다시 직언하기를 "견마의 피해보다는 사냥을 하느라고 조습장(강무장)을 금벌하기 때문에 뭇 짐승들이 출몰하여 곡식을 낭패시키니 이러한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강무장을 폐쇄할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 하고 더욱 강변하였다.

  드디어 태종은 간관 (諫官 )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하여 강무장 책임자인 내관 황도를 소환하니 장련 (長連)의 강무장은 폐쇄되었다.

  후에 태종이 물러나 상왕으로 있을 때 즉 세종 3년에 세종대왕(世宗大王)은 사냥을 좋아하는 상왕을 모시고 해주 강무장에 나가 오랜 기간인 전후 20여회에 걸친 강무훈련을 마친 다음 야외 대연회가 벌어졌다.

  그때 상왕은 수행해 온 정승 조말생(趙 末生)을 불러놓고 "내가 여러곳의 강무장을 돌아보았지만 여기만큼 기분이 좋고 훌륭한 수렵장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역대의 왕이 사냥에만 마음이 팔려 국사를 돌보지 않으면 곤란하며 또 그만큼 백성들의 피해가 올것이다. 이 넓은 강무장을 없애고 나무를 베어 개간하여 농토를 만들면 농업소득이 늘고 농가 피해를 없앨 수 있다 "고 하니 영특한 세종대왕은 상황의 이 말씀을 즉각 실천에 옮겨 해주 강무장은 그 후 폐쇄된 것은 물론이며 세종 ( 世宗)은 그로부터는 강무장 사냥도 일체 나가지 않았다.

  이것을 볼 때 간관(諫官)인 우당선생(憂堂先生)의 충언을 받아 받아들인 태종과 그것을 따른 아들 세종의 명군정치가 과연 황금기를 이룰 수 있었다고 하겠다.

  선생의 묘소는 밀양 운정(雲汀)이었으나 실전하여 밀양 소고야의 선부 송은묘소 앞에 제단을 갖추었으며 밀양 덕남원 (德南院)에 향사하였다. 후손들은 청도 밀양 등지에 대문중을 이루고 있다.  

경남 밀양 청도면 고법리에 있는 우당 선생의 재실  모우재 전경

 

 

 

 

 

 

모우재기

 

 

모우재 상량문

 

 

우당, 인당 선생의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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