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70)
학행이 빼어난 이요재(二樂齋) 삼형제의 화계재(華溪齋)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청도문화연구회 회원. 前 교장
청도군 각남면 칠성리 향인촌 화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화계재를 찾았다.
이곳의 배향 인물은 이요재(二樂齋) 장방익(蔣邦翼, 양헌(養軒) 장방호(蔣邦豪), 국헌(菊軒) 장방한(蔣邦翰) 선생 3형제이다. 본관은 아산(牙山)이며 금자광록대부 신경위 대장군(金紫光祿大夫神慶衛大將軍) 장서(蔣壻)의 후예인데 아버지는 장사효(蔣思孝)이다.
장남인 이요재 장방익 선생은 9세에 이미 화산에 있는 ‘대운암(戴雲巖)’을 보고 시를 지었다.
“몇 년째 바라보던 이 바위 끝에/ 오늘 오르니 바로 구월 가을이로구나/ 산은 그림 병풍되어 큰 골을 둘러싸고/ 냇물은 드는 칼 되어 평지를 가르네/ 마을에 즐비한 집 누구 누구네 집이런가/ 땅끝에 늘어선 곳 어느 고을/ 만약에 내 두 눈이 사해를 본다면/ 천리 안에 벼슬하려 애쓰지 않을 것을.”
이렇게 어릴 때부터 시문(詩文)에 능하고 학문적 경지가 높았던 공이었기에 18세에 과거에 응시했을 때 댱연히 장원급의 좋은 글을 지었다. 그러나 서리(書吏)가 농간을 부려 방(榜)에 이름을 감추는 통에 낙방을 했다. 크게 탄식한 공은 고향에 돌아와 과거에 더 나아가지 않고 화계(華溪)에다 집을 짓고 후학들을 가르쳤는데 그때 각지에서 공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문도가 50여 명에 이르렀다.
뒤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북부장사랑(北部將仕郎)이 제수되었고 사후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추증 되었다. 향년 62세로 작고했을 때 강고(江阜) 유심춘(柳尋春)은 “선생은 독실(篤實)한 행동과 선비다운 그윽하고 바른 지조를 간직하셨으며 후학들에게 은혜를 베푼 뛰어난 선비였네”하고 추모했다.
양헌 장방호 선생은 장사재(蔣思悌)의 계자(系子, 생부 장사효)인데 큰 형인 이요재와 동생인 국헌공과 더불어 우애가 남달랐으며 화계정사에서 학업에 매진하여 도량과 학문적 식견이 뛰어났고 의롭고 너그러운 덕업은 도덕군자였다. 장사랑(將仕郞)을 지냈는데 향년 45세에 유명을 달리했다.
국헌 장방한 선생은 삼형제 중 막내이다. 천성이 순후하고 명석하여 나이 12세에 이미 많은 서책을 두루 섭렵하여 경학에 능통하였으며 16세에 과거에 오르고 37세에 성균관 진사가 되니 조정과 유림 사이에 그 명성이 높았다. 향년 76세였다. 화양읍 신봉리에 공을 배향하는 만향재(晩香齋)가 있다.
화계재는 1818년(순조18)에 건립하였으나 1868년(고종 5)에 국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그 뒤 1958년에 새로 지었으며 그 동안 여려 차례 도색 및 기와 번와 등 중수했다. 대청벽에는 김필호가 찬한 ‘화계재 중건기’, 후손 장병구가 찬하고 서학균이 근서한 ‘화계재 중건 상량문’이 결려있다. 대문 앞에는 수령 400년이 된 보호수 은행나무가 있다.
삼형제 후예들 중에도 학행으로 빼어난 인물들이 많다. 이요재의 아들인 장희국(蔣熙國)은 공조참의에 추증되었는데 어진 아버지에 훌륭한 아들이라고 주변에 칭송이 자자했다. 국헌의 아들인 장희재(蔣熙載)는 지방에서 실시한 과거 초시인 향시(鄕試)에 3번이나 합격하는 등 학문으로 명성을 얻었다. 역시 국헌의 후예인 복암(復庵) 장화식(蔣華植)은 조선 말기 청도의 삼학사 중 한 분이다.
‘화계재’란 시제로 글을 올렸다.
이요재 삼형제 분 더 없는 우애로
학문을 일으켜 제자를 기르던 곳
우뚝선 큰 선비의 집 오래오래 이어가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