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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성주 한개마을

 

  2024년 5월 18일(토), 청도문화원 문화유적 탐방반 37명이 경북 성주군 월항면 소재 한개마을을 찾았다.  

  이 마을은 2007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마을 앞이 큰 내를 이루고 있다고 한개 마을이라고 하는 곳이다. 그런데 지금은 마을앞에 내는 보이지 않았다. 뒤에는 웅자한 산과 앞에는 냇물이 있는 그야말로 배산임수의 먕당이라고 안내를 하는 문화해설사가 설명을 해주었다. 그러고보니 마을이 참 평화롭고 인재가 날만한 지역으로 보였다. 

   한개마을은 조선 세종 때 진주목사를 역임한 이우(李友)가 1450년경에 입향한 이래 560여 년을 내려오면서 성산이씨(星山李氏)가 모여 살고 있는 전통 씨족마을이다.

  다수의 전통한옥이 잘 보전되어 있으며,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된 건축물이 9개 동에 이른다고 한다. 

  한개마을은 월봉(月峯) 이정현(李廷賢, 1587∼1612)에 와서 성산이씨의 씨족마을로 온전히 자리 잡았다고 한다. 월봉에게는 외아들 수성(壽星, 1610∼1672)이 있었는데, 수성은 달천·달우·달한·달운 등 네 아들을 두었다. 그들은 모두 마을에 정착하여 각각 백파(伯派)·중파(仲派)·숙파(叔派)·계파(季派)의 파시조가 되고 각 파의 자손들이 마을공간을 본격적으로 일궜다고 한다. 

  이 마을이 번창했을 때는 100호가 넘었다고 하나, 현재는 69호의 집이 있다고 한다.

 

 

고샅길 - 이 길이 과거 합격길이기도 했다

  가장 먼저 들린 곳이 진사댁이다. 

우물정 천장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추사의 '세한도'가 걸려 있었다
사랑채
광대바위
말을 타는 받침대

다음 찾은 곳이 이곳의 중심 가옥이라 할 수 있는 종가이었다.

북향집

이석문(李碩文, 1713-1773), 선전관에 이어  금부도사일 때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게 되자 세손 정조를 등에 업고 울며  사도세자의 구명(救命)을 간하였고 큰 돌을 들어 뒤주 위에 올리라는 명도 거역하여  태형 50도를 받고 파직 된 뒤, 낙향하여 집문을 뜯어 북향으로 만들고 사도세자를 그리워하며 한 평생 북쪽을 향해 매일 절을 올렸다고 한다. 뒤에 영조가 지난 일들을 뉘우치고 훈련원 주부를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원래 호는 돈재(遯齋) 이지만 별호는 북쪽으로 문을 냈다고 북비공(北扉公)이라고 한다. 

  1795년 (정조19) 공의 손자 이규진이 알성시에 장원하자 정조가 "네 할아버지 세운 공이 가히 아름답다. "라며 눈물을 보였고 경연에서 채제공(1720- 1799)을 대하고는  '북비'가 아직 있는지 물어보았다고 한다. 

응와 이원조의 증조부이다.  

 

 

 

북비 선생

 

그럴 수는 없다, 세자를 두주 속에서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비록 어명을 어겨 목숨을 잃는 한 이 있더라도 불쌍한 세자를 살려야 한다

어린 세손을 등에 업고 어전에 엎드렸다

"상감마마, 세손을 생각해서라도 세자를 살려주십시오. 천륜을 끊으면 안되십니다."

영조는 냉정했다

"무엄하다. 어서 물러나라"

더 간곡하게 아뢰었다

영조는 그의 애원을 들어주기는 커녕 오히려 큰 돌을 두주 위에 들어 올리라고 했다

목숨을 버릴 각오로 그럴 수는 없다고 했다

영조는 태형 50도를 치게 했다

살이 다 떨어져 나가 뼈가 보일 정도가 되어 까무라졌다  

파직되어  낙향한 뒤 사도세자가 운명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는 남쪽 방문을 전부 사도세자가 돌아가신 북쪽 방향으로 옮겨

아침 저녁으로 명복을 빌며 절을 올렸다

불면의 밤을 지새울 때마다

두견새가 따라 울었다

사람들은 그를 북비선생이라 불렀다

북비선생의 

북쪽 창문은 한 번도 봄이 오지 않았다

늘 겨울이고 

그믐밤 속에 

눈보라가 참혹하게 찢어낸 낙엽들이 

갈곳을 잃어 뒹굴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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