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97)
홍건적을 대파했던 노명신 (盧命臣) 선생의 추원재(追遠齋)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청도문화연구회 회원. 前 교장
청도군 이서면 대곡 4리에 자리한 추원재(追遠齋)를 찾았다.
이곳의 배향인물은 노명신 (盧命臣) 선생이다. 공의 본관은 장연이며 자는 충노(忠老)이고 고려 공민왕 때 홍건적을 대파한 공으로 대광보국 숭록대부 大匡輔國崇祿大夫) 일등공신으로 책록되었다.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인 청도(淸道)에 내려와 자연과 벗하며 살다가 세상을 마쳤다.
도시조(都始祖)는 수(穗)이다. 그는 중국 범양(范陽) 출신으로 당나라에서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다. 당나라 말기인 877년(신라 헌강왕 3)에 안록산의 난을 피하여 아들 아홉 형제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로 이주하였다.
6대조는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학사를 거쳐 예부상서와 좌·우복야를 지내고 참지정사에 이른 단(旦)이다. 최충과 함께 사숙(私熟)을 열어 후진 교육에 힘써 많은 인재를 배출했는데 12공도(公徒)의 하나인 광헌공도(匡憲公徒)이다. 묘소를 실전(失傳)하여 괴산 대덕에 설단하여 모셨다. 그런데 청도읍 원정리 모강마을 뒷산에 오래된 분묘가 노정승 묘로 전해지고 묘역 주변은 노정승 들이라고 불려지는 것을 알고 후손들이 이를 확인하여 찾게 되어 1988년 묘비를 새로 세웠다.
할아버지는 고려 희종(熙宗) 때 중현대부(中顯大夫) 사재시(司宰寺) 경(卿)을 지낸 영(詠)이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 운문산에 정자를 짓고 대비암이라 하고 학문과 수양하는 장수지소(藏修之所)로 삼았다. 왕자 사부로 불러도 응하지 않았는데 왕이 운문 40리 땅을 하사했다. 묘소는 화양읍 범곡리 동산고개 남쪽 산등성이에 있다.
맏아들인 국주는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상서이부(尙書吏部) 판사(判事)를 지냈는데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 청도(淸道)에 내려왔다가 경남 창녕군 월미촌(月未村)으로 이거(移居)하였다. 묘소는 유언에 따라 이서면 대곡리 부친 명신(命臣)의 묘소 아래 드렸다. 둘째 아들 태주(台柱)는 호군(護軍)을, 셋째 아들 성주(誠柱)는 문하평장사를 지냈다.
청도읍 원정리 통안 마을의 윗 통안에는 고려시대의 분묘들이 많이 남아있다. 이들 분묘 가운데 노씨의 묘가 많이 남아있다. 따라서 청도읍 원정리를 중심으로 이서면 대곡리에 걸쳐 장연 노씨들이 오랫동안 세거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매전면 장연리(長淵里)도 관향에 따라 마을 이름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는 많이 살지 않는다.
추원재는 목조와가 정면3칸 건물로 1910년에 창건했다.
장연 노씨의 무덤을 잘 가꾸면 득남을 하거나 가문이 번창한다는 전설이 전해 왔다고 한다. 이는 장연 노씨의 묘를 관리하는 사람에게 많은 묘답을 주어 관리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전해오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위의 내용은 후손인 계언씨의 면담과 김태호(향토사학자)의 ‘장연 노씨와 청도인물’ 을 참조하여 정리했다.
‘추원재’란 시제로 글을 올렸다.
큰 문벌 이루고 번창했던 장연노씨
거룩한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어
후인들 옷깃 여미며 큰 박수로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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