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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가 좋다

백곡 마을

 백곡 마을

 

    이서국 도읍지이며 탁영 종택이 있는 곳 / 2012.1.29(일)

 

 

                                                             행전 박영환

 

 

 

 

 

 

  청도군 화양읍  토평리(土坪里)  백곡 마을을 찾아갔다.  내가 이곳을 찾아간 데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이곳이 옛날 청도 지역에 터를 잡았던 이서국( 伊西國)의  도읍지이기에 그 흔적을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었고 또 하나는 청도가 낳은 큰 어른이신 탁영 김일손 선생의 종택이 있는 곳이니 선생의 체취를 느껴보고자 한 것이다. 

  이서국은 삼한시대 부족국가의 하나로 신라 유리왕 14년(297)에는 금성(경주)을 침공하여 신라를 위기에 몰아넣은 적이 있었다. 미추왕릉에서 나온 죽엽군의 등장으로 실패했지만 한 때는 상당한 규모의 힘을 갖춘 강국이엇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유적은 오산(鰲山)의 은왕봉(隱王峯) 및 망바위, 지역에 흩어져 있는 약간의 출토품, 지석묘 등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내심 이곳에 오면 다른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서국 흔적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서국의 흔적을 전혀 찾지 못한 것은 아니다. 눈에 보이는 흔적은 아니라도 이곳이 도읍지였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큰 흔적이었다.  옛날부터 도읍을 정하려면 왕궁을 보호하기 좋은 장소라야 하고 백성을 먹여 살릴 만한 평야가 있어야 하며 거기에 사람과 동물의 식수, 그리고 곡식을 재배할 충분한 물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청도 내에서 그런 곳은 누가 봐도 이곳이 최적지이다. 우선 이곳은 동, 서, 북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소쿠리 형이다. 비록 그것이 높은 산은 아니라 해도 마치 인공으로 성곽을 만든 것 같아 왕궁을 지키기에 아주 좋은 입지 조건이다. 실제 낮은 곳은 약간 인공으로 보충한 흔적도 보인다. 근래에 세운 것이기는 해도 이곳에 이서국성지(伊西國 城址)란 표석도 하나 세워져 있다. 또 이곳 토평리는  1리인 백곡뿐만 아니고  2리인 와촌(臥村,瓦村), 3리인 은행정(銀杏亭) 모두가 토성산의 연속으로 방위(防衛)촌이며 성외(城外)촌의 구실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등너머 둔직(屯直)이니 근위(近衛)니 하는 마을이 있는데 이 지명은 왕성 수비군이 주둔한데서 '屯直', 가까이서 지킨다고 '近衛'라 했다고 하니 왕궁이 있었다는 것을 받침하는 것이다.

 

그리고 근처에는 청도에서 제일 너른 곡창인 이서들(일명 하건지들)과 고평들이 펼쳐져 있다. 이 고평(古坪)은 한 때 이서국의 별궁이 있었기에 '고궁들'의 준말이라고도 하니 이 역시 또 하나의 증빙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이 들을 끼고  대곡천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청도천이 서에서 동으로 흘러와 합류하여 마침내 푸른 젖줄이 된 것이다. 이만하면 도읍지로서의 조건을  잘 구비한 것이다. 

  거기에다가 또 하나 왕도였다는 것을 증빙하는 것이 있다. '南山'이 그것이다. 남쪽에만 있다고 '남산'이라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통상적으로 도읍지가 있는 곳의 남쪽 산이라야 '남산'이라 하는 것이다. 서울의 '남산', 경주의 '남산'이 그 예이다.  백곡 마을에 들어와 보면 삼면은 산으로 둘러싸이고 남쪽만 가슴을 열고 있는데  그 정면에 남산이 안긴다. 그래서 도읍의 남쪽 산이라 하여  '남산'이라 했을 것이다. 이래저래 왕궁터였음을 확실하게 말해주는 것이다.

  '栢谷'이란 동명은 주위에 잣나무가 많아 '잣실'이라고 부르다가 한자 '백곡'으

로 표기한 것이라 하는데 아마 도읍지일 때는 다른 이름이 있었을 것 같다. 어쩌면 으뜸 마을, 맏 마을이란 뜻으로 '伯谷' 이었는데 나라가 폐망되고 난 뒤, 점령군에 의해 그 향수를 잘라버리기 위해 '栢'으로 바꾼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서국 멸망 후 김해 김씨들이 바로 이곳에 정착한 것은 아니다. 문헌이 없어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주, 여, 강(江), 황(黃)씨. 또 근대 조선 초에는 경주 최씨들이 거주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성씨들은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현재 이 마을의 중앙에 탁영종택이 있고 그 주위에 자손들이 혈연의 정을 나누며 오순도순 모여 살고 있다.  김해 김씨들은 이곳이 이서국의 도읍지였으며 그 길지에 자신들이 만대의 터전을 잡아  명문가로 정착한  것에 대해 큰 긍지를 가지고 있다. 이는 마을 경로회관 건립 기념비 문구에도 드러나 있다.  

  "본 동은 역사적인 이서고국의 옛 도읍이며 유서 깊은 삼현 후손 김씨 집성촌으로 많은 인재와 부귀를 배출한 복된 고장이다.' 로 시작되는 이 당당한 자부심. - 실제 이 말은 전혀 과장이 아닌 사실이다. 

  

                                                                                                                                          탁영종택

  

  우선 이곳에는 탁영종택(濯纓宗宅)이 있다. 이는 기념물 제161호이다.  

   김일손 선생은 1464년(세조 10년)에 태어났으며, 자(字)는 계운(季雲), 호(號)는 탁영(濯纓) 또는 소미산인(小微山人)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선생의 아버지는 사헌부(司憲府)의 집의(執義)를 지낸 맹(孟)이다. 영남사림의 거두 김종직(金宗直)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1486(성종 17년) 문과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아가 당시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훈구파의 불의와 비리를 규탄했다. 한편 사초(史草)에 세조의 왕위 찬탈을 풍자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실었는데  선생에 대해 극심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유자광(柳子光), 이극돈(李克墩) 등이 이를 알고 연산군을 충동질하여 마침내 선생을 비롯한 사림파들이 대거 극형을 당하게 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연산군 4년 1498)에 있었던 무오사화(戊午史禍)이다.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복관(復官)되고,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 도승지(都承旨), 이조판서(吏曺判書)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종택은 선생의 문집 등을 보관한 영모각(永慕閣), 안채, 사랑채, 행랑채, 그리고 선생 내외분의 위패를 봉안한 부조묘(不祧廟)로 구성되어 있다.

   선조11년(1578) 자계사(紫溪祠)를 자계서원(紫溪書院)으로 중건하고 자계서원에 탁영선생을 봉안하면서 종택이 있는 백곡에도 탁영선생 부조묘를 건립하였다. 현종2년(1661) 자계서원이 사액(賜額)되면서 사림(士林)에 의한 사불천위(私不遷位)에서 공불천위(公不遷位)로 사승(賜昇)되어 선생의 내외분을 봉향하였다.

  종택에 보관된  문적은 탁영선생 사후 도승지, 이조판서에 추증한다는 내용의 교지와 나라에서 시호를 내리는 내용을 담은 교지 및 그의 두 부인을 정부인에 올린다는 교지 등이다. 홀기는 자계서원에서 봄,가을에 제사를 올릴 때 쓰던 것이며, '둔전답 경자개양등록'은 서원의 전신인 자계사(紫溪祠)가 1578년 사액서원이 되면서 종전의 둔전답을 고쳐 만든 등본이다.

이것은 한 개인의 가계사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회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종택은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소실된 바 있어 새로 개축했으며 이후 헌종10년(1844) 때 노후된 부조묘를 재건하였고 다시 1940년에 정면 3칸 측면 1.5칸으로 개축하였다. 아무튼 이 종택은 문화재 기념물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백곡 마을의 김해 김씨 문중은 자손이 번창하고 수많은 인재와 고을 내 굴지의 만석꾼과 천석꾼 등 부자가 배출되어 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청도의 명문학교인 모계 중, 고등학교도 선생의 후손인 관재 김경곤 선생이 지난 1947년 8월에 설립한 것이다. 

   현재 탁영종택은 18대 종손 김상인씨가 지키고 있다. 포항에서 대학교수로 재직하고 있기에 포항과 종택을 오가며 관리하고 있다. 방문하는 내객이 있거나 문중 행사가 있을 때 외에도 평소 자주 종택에 와서 머무른다고 한다. 종손이 오기 어려울 때는 종부가 오고 또 제씨(弟氏)도 자주 종택에 들러 관리하고 있다.

  그는 어느 일간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탁영의 문집을 읽으며 그 정신을 되새겨 내고외금(內古外今)의 정신을 실천하며 선친의 가르침인 '경조효친가화체강(敬祖孝親家和體康)'을 잊지 않고 있다고 했다.

 탁영종택에서 지내는 제사는 명절 차사와 기제사, 그리고 묘사가 있다. 기제사는 4대를 봉사하는데 탁영선생을 불천위로 모신다. 차사와 불천위 제사는 종택의 사당에서 모시고, 4대 봉제사는 종손의 거주지 포항에서 지낸다고 한다. 시절 제사는 정월 초하루와 팔월 추석의 차례를 비롯해 한식·단오·동지 모두 다섯 차례다. 이때는 그 시절에 나는 주과포를 사당에 진설해 조상에게 올린다. 이렇게 볼 때 사당에서 지내는 제사는 불천위 제사 두 차례를 포함하여 모두 일곱 차례라 할 수 있다.

 

  종택을 나와 마을 뒤편 언덕, 소나무와 대나무 사이에 자리잡은 정자에서 잠시 쉬면서 마을을 내려다 보았다. 다시 보아도 품위가 있는 따뜻한 마을이었다.

  사실 이 마을은 전혀 낯선 곳이 아니다. 이곳에 나의 왕고모부 김세곤님, 종고모부 김종율님이 사시던 곳이다. 왕고모부님은 이미 고인이 되셨지만 종고모모부님은 여든이 넘으신 나이지만 아직도 종사의 작고 큰 일을 주관하시고 있다. 또한 나의 초등학교 동창 김희영 씨도 이곳 사람이다. 희영씨도 천석꾼의 후예이다. 이분의 집이 얼마나 크고 방이 많았던지 자기도 한 번 잠을 자지 않은 방이 많았다고 한다. 친구를 만날 때마다 늘 조상과 가문에 대한 긍지가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는데, 역시 그럴만하다는 생각을 새삼하게 된다. 

 

  또한 탁영 선생의 산소가 바로 우리 고향집 뒤에 있어 자주 산소에 찾아가곤 한다. 어쩌면 후손들보다 내가 산소에 더 많이 찾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선생인데 오늘 종택까지 찾게 되니 감회가 남다르다. 

  선생의 큰 뜻이 오래오래 펼져져 바르고 정의가 살아 있는 나라가 되기를 기원하면서 조용히 합장하고 물러났다.  

 

 

이서국 성지 표석 근처

 

종택 입구

 

 

영모각

 

동쪽에서 바라본 마을 정경

 

마을 뒤편에 있는 정자

 

 

옛날 부잣집들

 

 

이서국 성지 위의 수령 300년이 넘은 느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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