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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가 좋다

청도 팔조령 옛길 탐방

청도 팔조령 옛길 탐방

 

    행전 박영환

 

  2025년 2월 25일(화) 청도문화연구회 회원 30여 명이 청도 팔조령옛길 탐방을 나섰다. 이 고개는 대구와 청도의 경계선에 놓인 고개로 영남대로의 한 구간이다.

  중학교때  대구에서 자취를 하던 나는 어머니가 준비해놓은 반찬을 가져가기 위해 거의 매주 이 고개를 넘어다녔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이 고개 위로 버스길이 생겼으니 그때까지 중학교 3년, 고등학교 1년, 무려 4년을  넘어다녔다. 그런데도 이제는 나무와 잡초가 우거졌고 더군다나 60 여년이란 세월이 흘렀으니 도무지 길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아무튼 까까머리 시절 넘은 이후 60여년이 지난 이후 추억이 서린 옛길을 더듬어 찾게 되었으니 옛날 생각도 많이 나고 감회가 새롭다. 

  전번에 풍각제일교회 김영호 목사님과 짐작을 했을 때는 봉수대의 왼쪽(청도에서 봤을 때)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회장단에서 안내하는 길은 오른 쪽이다.  그런데 고개를 오르면서 생각하니 오늘 따라 간 길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그때 길이 두 개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좀 가파르더라도 빨리 가기 위해 지름길로 넘어다녔고 소가 짐을 싣고 갈 때는 둘러가더라도 다소 완만한 길을 택했다.

  한 번은 우리집 일꾼이 소 질매(길마)에 잔뜩 짐을 실었는데도 무리하게 지름길로 내몰아 더위를 먹게하여 소를 버리게 한 일이 있었다.  

  고개마루에 주막집에 부부가 있었다. 그분들은 주막집보다는 지능도 좀 떨어지고 걸음도 잘 걷지 못하는 아들을 온전하게 해달라고 산신당에 기도를 드리기 위해 그곳에 살고 있는 것 같았다.

  험준한 이 고개는 원래 도둑이 많이 붙어 여덟 명이 조를 짜야만 넘을 수 있다고 ‘팔조령(八助嶺)’이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八鳥嶺’으로 표기한 적도 있다. 이는 우리말을 이두식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아 팔조도 원래 ‘벌린 사이‘인데 축약되어 ’벌새‘ 가 되었으며 ’벌‘은 다시 느낌이 분명한 양성모음 ’발‘로 바뀌었다가 또 좀더 높고 험한 산의 의미를 주기 위해 거센소리 ’팔‘로 바뀐 것이라고도 한다.

청도 칠곡교회 주차장에서 출발직전(09시 50분)

모임 장소인 칠곡교회를 지나 09시 57분에 팔조령에 접어드는 길목(양원 27-1)에 조원붕(趙遠朋) 청덕애민비를 찾았다. 이 분의 선정비는 이곳 뿐만 아니라 매전면 관하리, 청도읍 월곡리에도 있다고 하니 백성을 위해 많이 노력했던 분 같다. 그런데 이 분의 비가 개인 사유지에 들어서 있고 그 앞에 바짝 붙혀 창고를 지어놓고 바로 앞에는 농자재를 쌓아놓았다. 세월이 가면 이렇게 잊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 

차로 이동하여 10시 11분 팔조령 저수지 밑에 있는 팔조령 신당에 들렀다. 이곳은 동리의 안녕을 빌기도 했지만 팔조령 고개를 넘는 길손들이 무사히 고개를 넘게 해달라고 기원을 하던 곳이다. 처음에는 고개마루에 있었으나 동리 분들이 동제를 지내기 위해 고개까지 올라가는 것이 번거로와 1950년대 현재 위치로 옮겨왔다고 청도마을지 등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신당의 이전 시기 및 이전 이유에 대해서 좀 생각할 점이 있다.  내가 고개를 넘어다니던 50년대 말에 이 신당을 본적이 있다. 나는 내가 본 것과 이 신당이 다른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게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새로 생긴 현재의 신당 안에 신사상개수(神社像 改修)에 성금을 낸 분의 명단이 적혀 있는데 계묘년(癸卯年) 정월 29일이다. 계묘년이라면 1963년이다. 산 위로 새 도로가 개설된 것이 1962년 경이니 그 당시 도로에 이 신당이 편입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정상 까페 자리가 주막집이고 그 앞 도로 중간쯤에 산신당이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런 연유로 마을에 옮겨와 새로 지은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면 신당은 1960년대에 옮긴 것이다.

  아무튼 이때도 이 동리 뿐만 아니라 인근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여 성금을 낸 것으로 보아 그때까지도 많은 분들이 신당의 필요성에 공감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양쪽 문에 그려진 장군신상

팔조령 중수 신당 상량문이다. 여기에 중수는 산위에 있을 때 1880년(고종 17)에 한 것이다. 

성금을 낸 분들의 금액과 명단이 적혀 있다. 

용맹하고 늠름한 장군 신상이다. 이분에게 기도를 드리면 도적도 피할 수 있고 호랑이도 물리칠 수 있다.

신당앞 조산이다. 길손들이 소망을 빌며 돌을 하나씩 쌓은 것 같다.

팔조령 고개를 넘던 시절을 회상하며 회원들에게 고개에 대해 잠시 설명을 했다. 

10시 30분경 신당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도보로 출발했다. 

10시 46분 통신선 앞에 도착했다. 지금은 감나무를 붙들어 매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지만 옛날에는 통신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통신선은 도로로 따라 설치했다. 바로 산밑이니 이제 본격적으로 옛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고개로 진입했다. 중학생도 잘 다니던 길이니 걱정하지 말고 넘어보자고 했다. 그러니 중학생이 훨씬 힘이 더 팔팔하다고 했다. 말인즉 옳다. 지금 7-80대에 들어섰으니 중학생 힘을 따르지 못할 것 같다.

11시 01분  가파른 길에 다다렀다. 옛날에도 이렇게 힘든 지점이 있었던 것 같다. 손을 땅에 짚고 기듯이 올라야 한다. 우리 국장님도 다리가 휘청거리고 있다. 

나무 뿌리가 한없이 아래로 내닫고 있다. 오로지 살아야 한다는 일념. 사람이나 나무나 절박하면 삶을 위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용기와 지혜로 그 방범을 찾는다. (11시 41분)

통신선이다. 통신선이 길을 따라 설치했다고 했으니 이길이 분명 옛길임에 틀림 없다. (11시 50분)

한숨 돌리며 만세를 부르고 있다. 고개를 오르는 사람들은 이 쾌감으로 산에 오른다.

12시 03분 드디어 큰길에 도착했다. 커피숍 바로 아래이다.  중간에 포산 곽씨 비석(11시 30분), 옥산 전씨 제단(11시 55분)을 지났다. 이 묘역들은 근래에 조성한 것이나 그곳이 옛날 묘들이 있었던 곳으로 짐작된다. 이로 미루어 보아 이길이 옛길일 가능성이 높다. 

청도 기독교 100주년 기념비이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였던 배위량(REV.Willam M.baird) 목사가 1893년 4월 17일 부산을 출발하여 청도에서 선교를 하고 4월 22일 이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그 기념으로 세운 비이다. 

기념 촬영

팔조령 해맞이 명소이다. 신년 1월 1일 되면 많은 사람들이 해돋이를 하면서 소망을 비는 곳이다. (12시 12분)

정상의 봉수대이다. 옛날 불을 피우던 봉수의 모습은 사라지고 낡은 안내판 하나가 우리를 맞았다. 옛날에는 위급한 상황이 있으면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했다고 한다. 청도 남산 봉소를 받아 대구 법이산으로 전달하던 곳이다.(12시 23분)

  산 아래에서 여기까지 약 1시간 반 정도 걸린 것 같다.

회장님이 봉수대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청도 박물관 내에 있는 미륵불이다. 원래 이 미륵불이 장연사에 있던 것인데 매전초등학교로 옮겨졌다가 이곳에 오게 되었다고 한다. 미륵불의 코가 떨어져 나가고 없다. 미륵불의 코를 만지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에 너무 많이 만져서 닳아 없어졌다고 한다. 하기야 만져서 없어진 것이 아니고 아예 돌을 찧어 갈아 마셨을 수도 있다고 한다.(13시 53분) 

김진태 선생이 장연사에서 옮겨온 경위와 미륵불에 대해 소상하게 설명하고 있다. 

칠곡 초등학교는 없어지고 이제 그 교가만 교정을 지키며 옛날을 말해주고 있다. 회원들 중에도 칠곡 출신이 많다. 옛날을 그리워하며 교가를 흥얼거린다.  (14시 08분)

같이 식사를 하면서 오늘 산행을 돌아본다. 의미있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