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창의를 한 청도 송은松隱 박익朴翊 선생의 후예 14의사義士
행전 박영환
*다음은 숭덕전 신문에 실린 내용입니다.

1592년(선조 25) 4월 13일, 부산이 함락되고 4월 18일에는 밀양, 20일에는 청도가 함락되고 말았다. 적들이 한양으로 진격하는 중요한 길목인 밀양, 청도가 일찍 적의 수중에 들어가자 삽시간에 영남의 6〜7개 읍이 적에게 짓밟히고 말았다.
이러한 절대적인 위기에서 밀성 박씨 소고공파 일가는 의병을 일으켜 지역과 나라를 지키는 데 앞장을 섰다. 이분들은 청도읍성 탈환을 비롯하여 청도의 곳곳에 침투한 적들을 소탕했고 때로는 인근 고을에 원정을 하기도 했다.
14의사들은 모두 부자父子, 형제, 숙질叔姪, 종형제 사이이다. 문중이 전멸할지도 모르는 위험 속에서도 구국의 일념으로 그들은 몸을 던졌다. 이는 면면히 이어져 오던 충절 정신이 계승된 것이다. 전쟁 때마다 의병들이 있었지만 이렇게 한 일가가 집단으로 의병에 참여했던 것은 시대를 통틀어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다. 열 네 명의 빛나는 행적은 ‘14의사 묘정비’에 새겨져 있다.
충렬사에 배향하는 14의사는 다음과 같다.
1)삼우정三友亭 박경신朴慶新(1539~1594)
무과전시武科殿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선천, 안동, 양근 도호부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를 역임한 후, 1591년(선조24) 5월 관직에서 휴가 중,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창의했는데 이는 임란 의병의 효시이다. 그 뒤 상경하여 어전에 나아가 아뢰는 자리에 청도 조전장淸道 助戰將에 임명되어 선조의 피란길 향도역 임무를 수행했으며 그 뒤 청도에 내려와 동면과 서면 의병대장과 합세하여 함락된 청도 읍성을 탈환했다. 청도 조전장과 밀양도호부사를 겸무하면서 계속되는 전투의 전상(戰傷)과 누적된 과로로 1594년 6월 5일 순직 하였다. 전투 일지인 『창의일록倡義日錄』을 남겼다. 1605년 선무원종宣武原從 1등공신과 호성원종扈聖原從 2등공신에 녹훈되었고 증 병조참판贈兵曹參判이다. 쌍둥이 아들 지남과 철남도 창의 공신이다.
2)용연龍淵 박경인 朴慶因 (1542~1592)
운문산 일대에서 전투를 벌이다 5월 8일 순절했다. 경신의 동생이며 의병장 선瑄의 아버지이다. 증 사헌부지평贈司憲府持平이다. 아들 선도 창의 공신이다.
3)제우당悌友堂 박경전朴慶傳 (1553~1623)
전쟁이 일어나자 “시운이 불행하여 국가가 위태롭게 기울어진 이때 몸은 비록 상중에 있으나 어찌 작은 허물을 피하여 대의를 허물게 하겠는가, 마땅히 몸을 잊고 충성을 할 것이다.” 하며 부친의 묘전에서 아우 경윤, 경선 삼형제가 같이 맹세 하고 창의하여 동생, 숙질, 수야 동민 100여명을 따르게 하여 큰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는 망우당 곽재우와 협력하여 큰 공을 세웠다. 창녕 현감을 역임했고 증 병조판서贈兵曹判書 자헌대부資憲大夫 겸 지이금훈련원사이며 선무원종2등공신이다. 공의 활약을 담은 『창의일기倡義日記』가 전한다.
4)국헌菊軒 박경윤朴慶胤 (1555~1626)
아들 린璘, 구球와 함께 창의하여 청도 매전면 두곡 전투 등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며 망우당 곽재우 장군의 화왕산성과 권응수 장군의 팔공산 그 중간에 진을 치고 서로 도우며 큰 공을 세웠다. 공은 전쟁 중에 훈련원 주부에 제수되었다. 증 자헌대부 병조판서贈兵曹判書겸 지의금부 훈련원사이요, 선무원종2등공신이다. 형 제우당과 같이 제작한 『배자예부운략排字禮部韻略』은 국가문화재 '보물 917호'로 지정되어 있다.
5)박경선朴慶宣 (1561~1592)
형 경전, 경윤과 함께 참여했으며 적과 싸우다 화살이 떨어지자 맨손으로 싸웠고 적이 오른 손을 자르니 왼손으로 적을 껴안고 절벽 아래로 떨어져 순절했다. 증직으로 승정원 좌승지贈承政院左承旨이다.
6)계애溪崖 박지남朴智男 (1565~1626)
아버지 경신을 따라 창의했고 동생 철남과 함께 수야의 대소가 청장년을 인솔하였다. 청도읍성 탈환에 전공을 세웠다. 무과에 급제하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으며 선무원종 2등공신이다.
7)운애雲崖 박철남朴哲男 (1565~1611)
지남의 동생으로 아버지 경신을 도와 청도 읍성 탈환에 큰 공을 세웠다. 충무위 부장忠武衛部將이며 선무원종 2등공신이다.
8)괴정槐亭 박선朴瑄 (1571~1614)
1590년에 관찰사 홍성민이 조정에 보고하여 창릉침랑昌陵寢郞에 제수되었다. 아버지 경인과 함께 창의하여 우익장右翼將이 되었다. 전쟁 중 상처가 매우 심하여 목숨이 위태로웠는데도 공격을 멈추지 않으니 적들이 상복喪服을 입은 공을 일컬어 ‘마의장麻衣將’이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겸 동지사同知事이며 선무원종3등공신이다.
9)운옹雲翁 박찬朴璨 (1572~1624)
동생 우, 숙과 같이 창의했으며 좌익장左翼將이 되었다. 훈련원첨정訓練院僉正이며 선무원종 3등공신宣武原從 3等功臣이다.
10)행와杏窩 박린朴璘 (1574~1650)
경윤의 장남이다. 무쇠를 녹여 창을 만들었고 원근 고을에 격문을 보내어 충의의 마음을 격동시켰다. 병자호란 때는 62세의 나이로 의병에 참여했다. 훈련원첨정訓練院僉正을 지냈으며 선무원종 2등공신이다.
11)기포杞圃 박우朴瑀 (1576~1637)
형님인 찬, 동생 숙 같이 공을 세웠다. 별시과別試科에 합격했고 남포 현감을 지냈다. 증 호조참의贈戶曹參議이며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남한산성으로 달려가 병마절도사 이의배李義培의 군진에 합류하였다. 경기도 광주 쌍령전투에서 순절하였다. 진무원종1등공신이다.
12)죽와竹窩 박근 朴瑾
성균진사成均館進士이며 창의하여 좌익장이 되었다. ‘창의 맹약문’과 격문을 널리 보내고 청도 운문진을 지켰다. 선무원종2등공신이다.
13)용암 박숙龍巖 朴琡 (1578~1639)
가장 젊은 나이인 15세에 형님인 찬, 우와 같이 창의하여 용맹을 떨쳤다. 군자감 봉사軍資監奉事를 지냈으며 선무원종 3등공신이다.
14)박구朴球 (1577~1665)
아버지, 경윤, 맏형 린과 함께 참여했다. 훈련원 판관訓練院判官을 지냈으며 선무원종 3등공신이다.
박씨 일문의 의병활동은 삼창삼순팔의三倡三殉八義로 불려지고 있다. 즉 경신, 경전, 경윤은 창의삼충倡義三忠이며 임란 때 순절한 경인, 경선과 병자호란 때 순절한 우는 순절삼충殉節三忠이고 지남, 철남, 선, 찬, 린, 근, 숙, 구는 거의팔사擧義八士이다.
송은松隱 박익朴翊 선생의 6세손과 7세손인 이 14 공은 청도군 이서면 학산리 용강서원龍岡書院 내 충렬사忠烈祠에 모시고 춘추로 제향하고 있다.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시인
전 청도문협 회장, 전 교장
동아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
부산에서 중등학교 교장으로 정년 퇴임 후 청도 고향에 돌아와 '청도문화연구회' 활동을 하면서 '청도 향교지', '청도마을지' 편집위원을 지냈으며 현재 '청도신문'에 '청도지역 서원, 재실, 고택 탐방'을 연재하고 있다. 청도문인협회장을 지냈으며 시집 '청도에 살어리랏다', '하루를 건너며' 수필집 '종소리의 뜨락에서', '솔바람 초록빛 바다', '안경을 왼손에 들고'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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