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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가 좋다

영남대로 팔조령 고갯길

     영남대로 팔조령  고갯길/ 2016년 7월 27일(수)/ 청도군 이서면 팔조리
 

  팔조령은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과 청도군 이서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이다예나 지금이나 이 고개는 청도 산서지역의 방어벽인 동시에 북쪽 관문이기도 하다그런데 이 고개는 문경 새재 및 작원관(밀양의 삼랑진과 양산사이에 있는 낙동강을 낀 산 기슭)과 더불어 동래에서 서울을 잇는 영남대로 중에서 험하다고 소문난 3대 관문 중 하나이다.
  향토사를 연구하는 김태호 선생의 설명에 의하면 이 고개의 이름이 지금은 한자 표기가 八助嶺이지만 옛날에는 八鳥嶺으로 표기 된 적도 있다고 한다이 새 의 표기 경우는 우리말을 이두식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며 그 예로 문경의 새재도 원래 순수한 우리말 사이재인데 새재로 음절이 축약되었다가 이두식으로 조령(鳥嶺)이 된 것이라고 했다이렇게 유추하면 팔조도 원래 벌린 사이인데 축약되어 벌새‘ 가 되었으며 은 다시 느낌이 분명한 양성모음 로 바뀌었다가 또 좀더 높고 험한 산의 의미를 주기 위해 거센소리 로 바뀐 것으로 보는 것이다여기까지 진화하면 이두식 표기 는 그 수명을 다할 수밖에 없고 고개가 험준하고 도둑이 많아 여덟 명이 모여야만 넘을 수 있는 고개란 전설을 탄생시키면서 八助가 된 것이라는 것이다.
  60년대 초 까지만 해도 팔조령은 팔조마을을 거쳐 산길로 접어들었는데 길이 두 개 있었다하나는 지름길이고 하나는 둘러가는 길이었다지름길은 거의 직선으로 되어 있었기에 좀 빠르게 갈 수는 있으나 경사가 매우 심하여 숨이 턱에 닿아 들숨 날숨 했다둘러서 가는 길은 경사가 완만하여 시간이 많이 걸렸다그러나 노약자나 등짐을 실은 소들은 이 길을 가야만 한다그런데 한 번은 우리집 일꾼이 소의 질매(길마의 방언)에 쌀을 가득 싣고 지름길을 올라가게 했는데 그 이후 소가 더위를 먹어 한 마리 완전히 굳힌 일이 있었다그 만큼 험한 고개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신당
신장상
팔조령 신당 중수 상량문

  팔조령 길목인 저수지 밑에 신당이 있다. 토담 안에 한 칸으로된 집이다. 이곳은 마을 동제를 지내는 곳이자 길손들이 무사히 고개를 넘게 해달라고 빌던 곳이다.  신당 헌성록(獻誠錄)’에 수 많은 사람들이 이름을 올린 것으로 보아 팔조리 동민은 물론 이웃이나 길손들까지 매우 관심을 갖고 지었던 것 같다토석 담장에 둘러싸인 신당 중앙에는 칼을 든 신장상(神將像)을 모셨는데 길손들은 그 앞에서 축원문을 읽었다고 한다그러나 1960년대에 고개에 차도가 생기고 근래에는 터널까지 뚫려 걸어서 넘는 사람이 없고 보니 점차 그 기능을 잃어 오랫동안 돌보지 않았다. 얼마 전  청도 향토사학회에서 답사를 다녀와서 청도군청과 관계 기관에 보고하고 청도신문에 기고하면서 약간의 관심을 가졌는데  그런데 보수를 하고 난 뒤에 가보니 안에 걸려있던 신장상은 없어지고 그 장소에 위패만 모셔졌다고 한다.
   원래 이 신당은 팔조령 고갯마루에 있었다.  그리고 신당 주변 성황당은 길손들이 이곳을 지나가며 돌을 던져 양밥을 하며 빌었던 조산이었는데 그 높이가 무려 2미터에 이르렀다고 한다. 아무튼 신당은 마을 사람들이 제를 지내려고 밤중에 고갯마루까지 올라가는 것이 번거로워 1950년대에 현재의 장소로 옮겨왔다고 한다. 신당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종 17년인 1880년 이후부터는 지속된 것 같다.
  내가 중학교를 다니던 때가 1950년 후반인데, 그 때 고갯마루에 성황당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어떻게 생각하면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성황당과 신당은 몰라도 산신각 하나는 분명히 있었다.  산신각에 그림이 하나 있었는데 호랑이를 안고 있는 신선의 모습이었다. 이곳은 고갯마루에 살고 있는 부부가 온전치 못한 아들을 위해 기도드리던 곳이기도 하다. 뒷날 나는 이를 소재로 하여 구곡령이란 소설 한 편을 발표했다. 물론 소설이니 픽션이 많이 가미되었지만 실제 겪었던 일들도 녹아 있다.
  참, 많이 넘어 다녔던 고개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62년에 고개위로 길이 뚫렸으니 중학교 3, 고등학교 1년 합 4년을 꼬박 걸어서 이 고개를 넘어 다녔다. 대구에서 자취생활을 하던 나는 쌀이며 반찬을 공급받기 위해 거의 매주 이 고개를 넘었다. 우리집에서 대구까지는 70리 길인데 고개 너머 가창면 삼산 버스 정류장까지는 30리를 걸어와서 대구까지 40리는 버스를 타고 들어갔다.

  지금은 산위로 다니는 길마저 불편하다고 터널이 두 개나 뚫려 왕복 4차선으로 달리고 있으니 금석지감이 든다. 그런데 사실 그 때는 그것이 그렇게 불편한 줄 몰랐다. 의례히 그렇게 하는 줄 알았다. 하기야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농사일을 거들고 있는 또래들에 비하거나 지방에서 중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에 비해서 대구에서 공부를 하고 있으니 그런 정도는 의례히 겪어야 할, 이를테면 호강 고생으로 생각했다.
  나는 우리집에서 조금 떨어진 마을인 상당에 사는 고종사촌 동배와 같이 다녔는데 대구까지 걸어갈 때도 많았다. 봄에는 계곡에 지천으로 핀 진달래를 따먹고 놀다가, 가을에는 토실토실한 아람을 줍다가 버스를 놓친 것이다. 하기야 어떤 때는 아예 버스비로 사탕을 사 먹고 대구까지 걸어갔다. 우리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당시는 그렇게 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팔조동에 사는 곽 아무개라는 분은 대구까지 마라톤 연습을 한다며 뛰어다니기도 했다.
  버스 정류장 근처에 오면 나무를 실은 달구지들이 줄을 이었다. 그 당시 대구만 해도 나무를 때는 집이 많았는데, 그 때도 산에 나무를 하는 것을 금하던 때라 가창 골짜기에서 대구로 나무를 팔러가는 사람들은 낮에는 가지 못하고 밤에 몰래 들어갔던 것이다.
  어린 중학생들이 짐을 지고 뒤에 따라가면 애처로운 생각이 들어 아이는 태워주지 않아도 짐은 달구지 위에 얹어 주었다. 우리는 그 당시 그것을 은근히 기대하고 달구지를 따랐던 것이다. 그러나 간혹 인심이 좋지 못한 분을 만나면 하는 수없이 대구까지 끙끙거리며 짐을 지고 따라 갈 수밖에 없었다.

 

팔조령 봉수대
일행들이 봉수대를 찾아 설명을 듣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이 넘어서 다니던 고개인데 이곳에 봉수대가 있다는 것은 몰랐다. 이번에 처음 알았다.

봉수(烽燧)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하였다. 우역제(郵驛制)와 더불어 신식우편(新式郵便)과 전기통신이 창시되기 이전의 전근대국가에서는 가장 중요하고 보편적인 통신방법이었다.
  역마(驛馬)나 인편(人便)보다 시간적으로 단축되었고, 신속한 효용성을 발휘하여 지방의 급변하는 민정상황이나 국경지방의 적의 동태를 상급기관인 중앙의 병조에 연락했다. 봉수제는 일반 국민들의 개인적인 의사표시나 서신을 전달할 수는 없는 것으로, 국가의 정치·군사적인 전보기능(傳報機能)을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청도지역은 세 곳의 봉수대가 있다. 그 하나가 남산봉수대이다. 봉수대의 초축시기는 고려시대이며 청도군 화양읍 범곡리와 청도읍 원리 경계의 봉우리에 위치했다. 그 다음이 종도산 봉수대인데 오산지에 의하면 남산 봉수대가 옮겨온 것이다. 향토사를 연구하는 김태호 선생과 박윤제 문화원장이 발견한 것이다. 이곳은 가장 늦게 만들어졌지만 돌담 등은 가장 완전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그 세 곳 중에 하나인 팔조령 봉수대를 박윤제 원장과 김태호 선생의 안내로 찾았다. 이 봉수는 남으로 청도 남산 봉수대에서 신호를 받아 북으로 대구 수성현 법이산 봉수대에 연결하는 역할을 했던 곳이다. ‘우리문화 바로알기’ 10여 명의 회원들은 차를 정상부근 까페 앞에 주차시켜놓고 소로를 따라 올라갔는데 정상부근에 있었다. 안내판과 봉수대 흔적들이 있었지만 거의 찾는 사람들이 없는지라 수풀과 가시 넝쿨에 가려있어 오늘처럼 이렇게 설명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곳이 봉수대라고는 도저히 알지 못할 정도였다.
  봉수대는 정상의 경사가 급한 지점에 축조되었던 것 같은데 거의 허물어져 있었다. 박 원장의 설명을 요약하면 이러하다.
  석축 방호벽을 통해 본 봉수대의 평면 형태는 북동 - 남서를 장축으로 하되 단벽과 장벽이 이어지는 부분은 모를 줄여 둥글게 마감한 말각 장방형이다. 봉수대의 규모는 장축 29.6미터, 단축 21미터, 전체 둘레는 90미터 정도이다. 방호벽은 4벽이 모두 석축으로 되어 있으며 잔존 상태는 남쪽이 가장 양호하다. 남쪽 방호벽의 높이는 외벽부에서 2.4미터 정도이다. 청도지역 봉수는 웅천 천성보 봉수대에서 시작하는 2거 간봉 8노선의 아홉 번째와 열 번째의 봉수이다.

  팔조령 정상 조금 아래 제2휴게소 근처에 청도반시를 알리는 조형물이 있다. 또한 팔조령 해맞이 명소란 안내 표석이 하나 있다. 음력 정월 초하루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와 힘차게 솟는 붉은 해를 바라보며 한 해의 소망을 기원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청도 기독교 100주년 기념비도 있다.
옛날 추억을 떠올리며 길을 걸어본다. 옛날에 수없이 걸어왔던 칠곡이며, 양원, 팔조 저수지 위로 열심히 걸어오는 까까머리 중학생 하나가 보인다.



* 2024년 6월 3일, 풍각 제일 교회 김영호 목사님이  전화를 했다. "선생님께서 학창 시절에 팔조령 고개를 많이  걸어 넘어셨다는데 그길이 바로 영남대로이고 또 우리 교회쪽으로도 청도에 기독교를 전도하신 선교사 분이 넘은 고개이니 관심이 많습니다. 한 번 같이 답사를 했으면 합니다."

"많이 넘기는 했지만 그게 벌써 60년도 훨씬 더 전의 일이라 정확하게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모처럼 부탁하시니 한 번 가보도록 합시다. 혹시 기억이 나는지..."

그렇게 하여 임수무 교수(풍각제일교회 장로)와 같이 팔조동에 들어섰다. 김 목사가 차를 몰아 윗팔조리 길이 끝나는 곳에 주차했다. 김 목사는 전에도 몇 번 왔기에 오히려 나보다 더 익숙하게 안내하며 통신 표지선도 알려주며 이곳으로 오르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이곳이 주막이 있었던 것 같다고도 했지만 나는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그때는 중학생 때이라 주막에 들른 적이 없었다. 

"김 목사님이 이렇게 물을 줄 알았다면 그 때 단단히 길을 익혀두는 건데... 그때는 그냥 열심히 다니기만 했지 전혀 지형을 익혀 두지 않았습니다." 마침 주인이 없는 오디가 지천으로 달려 있어 세 사람은 입이 새카맣도록 따 먹을 수 있었다. 

  나는 현재  산위 도로 옆 까페(현재는 영업을 하지 않음)가 있는 지점이 넘어다니던 고갯마루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란 것이다.  김목사가  추측하는 길을 가만히 살펴보니 그게 동리에서 바로 넘을 수 있는 고개 같았다. 

우리는 터널을 지나 반대쪽으로 갔다. 그쪽에서 보니 봉수대 우측에 낮은 부분이 있었다. 그곳으로는 지금도 등산객들이 다니는 길이 있었다. 한참 따라 올라가면서 곰곰히 생각하니 맞는 것 같았다. 

  다시 고개로 오르는 길로 가서 까페 앞에 차를 주차하고 능선을 따라 올라갔다. 봉수대가 높은 곳에 있고 그 밑에 낮은 지대가 있었다.  그곳에서 내려다 보니 마을로 내려가는 지름길이었다. 그리고 고개 위에  묘지로 되어 있는 곳이 옛날 주막집터 같았다. 아마도 그곳으로 넘어 다녔던 것 같다. 

  산신각 자리도 짐작해보았다. 분명히 조그마한 샘이 하나 있었던 것 같은데 그걸 찾으면 확실하다. 그 우물을 봉수대 지키는 병사들도 이용했을 것이다. 풀이 우거져 찾을 수는 없었다. 내려오면서 동리 앞에서 고개를 쳐다보니 그길이 맞는 것 같았다.  뒤에 다시 찬찬히 답사해야겠다. 

 

      

팔조령 고갯길

                                           
  행전 박영환
 
 
팔조령 고갯길은
굽이굽이 소리가 쌓이는 길이다
길손들의 발자국 소리
새소리바람소리산짐승 소리
거기에 꽃 소리 구름 소리
오늘은 어떻게 넘나미워서 쳐다보던 한숨소리
오르다가 쉬어 가고 쉬었다가 오르던
턱에 닿던 거친 숨소리
 
정말 혼자 지고 갈 수 있겠나조심해라가는 길로 쉬는 것부터 먼저 먹고
나도 인제 중학생인데 걱정 마이소집에 퍼떡 가이소
딴에는 아들의 큰 소리
이십 리 고개 밑까지 이고 온 쌀자루와 반찬을 내려놓고
그래도 마음을 놓지 못해 걱정을 하던 어머니의 애잔한 목소리
 
고개 위 산신각
온전치 못한 아들을 제발 굽어 살펴달라고
애절하게 빌고 빌던 기도소리
오냐오냐 들어 줄게
그 소리 듣고 싶어
선홍빛 눈물 퍼붓는 무릎 닳는 소리
자기 가슴 한 번 치고 아들 가슴 한 번 치던 소리
 
버스비로 과자 사 먹고 걸어가자
고종 사촌 동배의 사탕소리
끝나기도 전에 좋다 해놓고
대구길 황톳길소달구지 소리 따라 걷던 길
입에 사탕 녹는 소리돌부리 차는 발의 비명소리
 
소리가 소리를 업어주며
이야기 소리를 만들어주던
팔조령 팔 고개, 추억의 그 소리들.

 

 

고개로 오르는 길
 

정상 바로 아래 해맞이 명소가 있다.
 

해맞이 명소에서 내려다 본 전경

 

 
 

배롱나무꽃이 붉다 

 

휴게소

 

 

청도 기독교 100주년 기념비

 

 

길손들이 쉬어가는 정자

 

청도를 대표하는 과일 '청도반시'를 알리는 조형물

 

경상북도와 대구의 경계임을 알려준다

 

산나리가 한창이다

 

일행들의 기념촬영
 
 

웅천 천성보 봉수대(현재 부산 가덕도 연대봉 위에 있다) 이는 경상도는 제2거 중에 첫 봉수대이며 여기에서 산성 - 자암 - 밀양 백산 등을 거쳐 청도 남산 - 북산(팔조령)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