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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가 좋다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99)선대의 절의 정신을 이어받은 모강 손순욱(慕崗 孫筍彧) 선생의 모선재(慕先齋)

모선재

 

청도신문(2023년 8월 9일)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99)

선대의 절의 정신을 이어받은 모강 손순욱(慕崗 孫筍彧선생의 모선재(慕先齋)

 

행전(杏田박영환(朴永桓)

청도문화연구회 회원前 교장

 

  청도읍 원정리 흑석마을에 웅장하게 자리잡고 있는 모선재를 찾았다이곳의 배향인물은 모강 손순욱(慕崗 孫筍彧선생이다.

  공의 본관은 일직(一直안동)이며 6대조는 정평공 홍량(靖平公 洪亮), 고조는 한성판윤 영유(永裕), 증조는 장흥고사(長興庫使(), 할아버지는 격재 조서(格齋 肇瑞), 아버지는 무공랑광흥창승(務功郞廣興倉丞)을 지낸 윤하(胤河)이다.

  공은 참봉을 지냈고 1500년대 초에 밀양 용평(密陽 龍平)에서 청도 원정동 모강(慕岡마을에 시거(始居)한 일직 손씨 청도파의 입청도조이다시와 예학으로 만년을 보내는 한편 자손들의 훈도에 진력하고조상의 절의 정신을 받들어 지켰다.

  공의 선대는 원래 안동에 터전을 잡고 살았다. 6대조인 정평공만 해도 안동군 일직면 송동(松洞)에서 출생했다벼슬이 추성보절좌리공신 삼중대광판삼사사(推誠保節佐理功臣 三重大匡判三司事)에 이르렀으며 직성군 복주부원군(直城君福州府院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정평(靖平)이었다.

  그 뒤 증조부 관()이 안동에서 밀양으로 옮겼다이는 한성판윤(漢城判尹고신인(高信仁)의 外孫(외손)으로 외조부의 제사를 받들기 위함이었다그런데 다시 청도로 옮긴 것은 할아버지 격재(格齋)공의 충절과 관련이 있다.

공은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 봉산군사(鳳山郡事등을 지냈다평소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듣지 말고말하지 말고행하지 말라는 사물잠(四勿箴)을 몸소 실천하였으며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등과 도의지교를 했다.

그러나 단종의 복위를 꾀하던 사육신이 극형을 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은둔하였으며세조가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임명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왕명을 어긴 화()가 예측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이때 집안의 아들손자와 조카들은 멀리 충주를 비롯하여 대구경산청도 등 곳곳에 흩어졌다그러나 멀리 떨어져 살았으나 조상을 잊지않고 모()자에 의탁하여혹 호를 삼기도 하고때로는 지명으로 부르며 숭모하는 마음은 한결같았다.

  참봉공의 14세손 성하 경헌(成河 庚憲)은 독립의사이다삼엄한 일경의 경계망을 뚫고 거액을 모금하여 상해임시정부에 전달하고 만주군정서(滿洲軍政署및 신흥무관학교 등의 건립자금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그러나 애석하게도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타계하였는데 아직도 유해를 모셔오지 못했다경남 밀양시 산외면 다죽리에 사적비(事跡碑)가 있다.

  모선재는 2000년에 이건한 재실이다그 이전에 모강서당과 그 자리에 세운 모선재가 있었지만 근년에 건물이 좌우로 들어서 종의에 의해 현재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5칸의 정당과 낙지문(樂志門), 하당을 갖추었다방후손(傍後孫태규(泰奎)가 쓴 모선재기’ 옥산(玉山전병철(全炳澈)이 쓴 모선재 이건기’ 등이 걸려 있다.

이날 탐방에 후손 복수씨가 많은 자료를 제공하고 안내했다.

 

모선재란 시제로 글을 올렸다.

 

  모선재에는 계단이 많다

 계단을 오르며 선대의 절의 정신을 새기고

 계단을 내려오며

 선대의 뜻을 다짐한다

 모선재는 새기고 다짐하는

 그래서 선대와 후대가 함께하며나를 버리고 우리를 가득 채우는 곳이다.

 

격재 손조서 신도비( 밀양시 산외면 다죽리)

 

모선재 전경

 

모선재 기문

 

독립의사 성하 손경헌 사적비( 밀양시 산외면 다죽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