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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가 좋다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95)충효(忠孝)의 가문으로 빛나는 이도(李都) 선생의 흥인당(興仁堂)

흥인당

 

청도신문(2023년 6월 14일)

청도지역 서원재실고택 탐방(95)

충효(忠孝)의 가문으로 빛나는 이도(李都) 선생의 흥인당(興仁堂)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청도문화연구회 회원.  교장

 

  청도군 이서면 흥선리에 자리잡고 있는 흥인당(興仁堂)을 찾았다. 이곳의 배향 인물은 이도(李都) 선생이다. 공의 본관은 고성(固城)으로 시호가 양헌(襄憲)인 원(, 호는 容軒, 우의정)의 후예이며 통훈대부 안기도찰방(通訓大夫 安奇道察訪)을 지냈으며 고성이씨 입청도 선조인 모헌공 육(慕軒公 育)의 다섯 째 아들이다.

  공이 화양읍 유호(柳湖)에서 생장하여 흥선으로 택거(擇居)하였다. 기개가 높고 깨끗하여 한 점 티끌이나 먼지가 쌓임이 없었던 공은 봉직랑의금부도사(奉直郎義禁府都事)에서 물러난 뒤 원근의 학자들과 더불어 자연과 벗하며 지냈다. 아들 기()는 진사시(進士試)에 장원 합격하였다.

  손자 자암 잠(紫巖 潛)은 효성이 지극하고 수양이 깊고 학문이 높아 자암서당(紫巖書堂)을 짓고 교육에 열중하였다. 임진란이 일어나자 창의하며 철마산성과 오례산성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그 뒤 진주성 전투에서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32세 젊은 나이로 순절하였다. 선무원종 공신 2등에 녹훈되고 통정대부 병조참의(通政大夫 兵曹參議)에 증직되었다. 위패는 진주 창렬사(彰烈祠) 서사(西舍)의 수위(首位)에 모시고 있다.

  국사학자 이병도(李丙燾) 국사대관에서 김천일(金千鎰) 장군이 이끄는 진주 전투에서 왜적과 맞서 싸우다가 목숨을 버린 이잠 의사를 비롯한 10인을 회고하며 진주의 혈전이야말로 조선혼(朝鮮魂)을 철저히 발휘한 일대 금자탑이라 하며 충절을 기렸다.

  동생 농현당 철(弄絃堂 澈)도 형과함께 창의하여 곽재우(郭再祐) 진중 정암 나루터 전투 등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형 자암공의 순절 소식을 접하고 대성통곡하며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치렀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전투에 입은 후유증으로 투병하다가 40세에 운명하였다. 조정에서 충의위 참봉(忠義衛 參奉)에 증직했다. 임란 때 창의를 한 고성 이씨 5의사는 잠, 철을 비롯하여 당숙(堂叔)인 경()과 재종 형제인 해(), ()이다. 유호동에 고성이씨 청도 5의사 숭모단이 조성되어 있다.

  현손 광재(光載)는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이며 7대손 채련정 용로(採蓮亭 龍老)는 증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通政大夫 僉知中樞府事)이며 12대손 성강 정주(聖岡 庭柱)는 흥인당에서 강학을 한 학자였으며 13대손 준기(準基)는 장학회를 설립하였다. 15대손 승율(承律)은 청도 군수(민선 67)를 역임했다.

  흥인당은 1937년에 창건했으며 정면 4칸의 건물이다. 창건 때 심은 큰 벽오동이 마당에 있으며 2022년에 중수했다.

  순재(醇齋)김재화(金在華)는 흥인당 기문에 옛부터 선()함이 으뜸이라, 이에 선함을 흥()하고자 할진대 반드시 인()을 일으키는 것이 시작이요, 이란 사람다움이고 친족을 사랑함이 으뜸이니 이 가문이 잘 되는 흥인(興人) 까닭이다.” 했다. 재실 앞에 이 정신을 새긴 표석을 세우고 후손들이 대를 이어 잘 지키며 충효가문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이날 후손인 종길씨가 안내를 해주었다.

 

흥인당이란 시제로 글을 올렸다.

 

어진 마음 북돋우고 착한 마음 일으키어

나라를 구하고 문중을 지켰도다

오늘도 친친親親 또 친친 흥인당 충효 가문

 

흥인 표석
흥인당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