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지역 서원•재실 탐방(1)
올곧은 선비의 표상인 자계서원(紫溪書院)
행전(杏田) 박영환(朴永桓)


2019년 6월 25일(화) 청도신문
청도지역에는 열여섯 곳의 서원이 있다. 서원 탐방 계획을 세워놓고 제일 먼저 찾은 곳이 경북 청도군 이서면 서원리에 있는 자계서원이다. 이곳은 우리 청도가 낳은 큰 선비인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선생을 비롯한 절효(節孝) 김극일(金克一),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 선생 즉 김해 김씨 삼현(三賢)을 모시고 있는 청도에서 가장 오래된 서원이다.
사실 이곳은 이번에 처음 찾은 것이 아니고 유림 행사 및 향사 등에 참여하기 위해 자주 들리는 곳이다. 특히 탁영 선생의 산소가 우리집과 불과 100여미터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는 뒷산 기슭에 있어 흡사 우리 선대 어른처럼 느끼며 자랐기에 늘 흠모하는 마음으로 방문하고 있다.
자계서원에 배향된 세 분 중 주벽인 탁영 김일손(1464~1498)선생의 자(字)는 계운(季雲)이고, 호(號)는 탁영(濯纓)이며, 시호(諡號)는 문민(文愍)이다.

아버지는 이조참판 남계(南溪) 맹(孟)이고, 조부는 절효(節孝) 김극일(金克一)이며,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제자로 23세 때 문과(文科)와 전시(殿試) 등에 각각 장원으로 급제하여 관직을 시작하였다.
탁영 선생이 살았던 15세기 후반 조선의 정치사회는 낡고 병든 보수적 정치세력, 훈구파를 청산하고 새로운 도덕과 사회질서를 요구하는 변혁의 시기로 사림파의 성장이 두드러진 시기였다. 김종직(金宗直)을 중심으로 하는 영남 사림파는 주로 언관이나 사관같이 비판적인 기능을 할 수 있는 직책에 포진되어 훈구파를 견제하였다. 그 중심에 탁영 선생이 있었다.
성종이 승하하고 난 뒤 춘추관 사관(史官)으로 있던 선생은 성종실록을 편찬하기 위한 사초(史草)에 세조찬위의 부당성을 풍자한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실었다. 이때 훈구파들은 자신들의 비행도 수록될 조짐도 보이자 이 ‘조의제문’을 빌미삼아 공격을 했고 마침내 연산군 4년에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년)때 35세젊은 나이에 참형을 당하게 된 것이다.
저서로는 『탁영집(濯纓集)』이 있으며, 유품은 1490년(성종21)경에 직접 제작한 6현금(6弦琴)이 있다. 이는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거문고로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957호로 지정된 “탁영금(濯纓琴)” 일명 문비금(門扉琴)이다. 또 성종으로부터 하사받은 “매화벼루”가 있고 그외 여러 교지, 자계서원 둔전답경자개량등록(屯田沓庚子改良謄錄), 자계서원의 사액시 치제(致祭) 홀기(笏記)는 유형문화재 제27호이다.
다음 배향 인물인 절효 김극일(1382-1456) 선생의 자(字)는 용협(用協)이고, 호(號)는 모암(慕庵)이다. 의흥 현감 김서(金湑)의 아들이며, 탁영 김일손의 조부이다.
야은 길재(吉再)의 문인으로 세종조에 사헌부 지평(持平)을 지냈고, 향리에서 후학들의 훈도에 힘썼다. 증직(贈職)은 사헌부 집의(執義)이다.
타고난 효자로 부모님에 대한 효행이 지극했다. 이 일이 임금에게도 알려져 정문(旌門)하였는데 향리유림과 제자들이 그 효행을 후세에 귀감으로 삼고자 사시호(私諡號)를 절효(節孝)라 했고,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에 등재되었다. 저서로는 『절효선생실기(節孝先生實記)』가 있다. 묘소는 각북면 명대리에 있으며 묘재인 ‘모암재(慕庵齋)’가 있다.
또 한 분의 배향 인물인 삼족당 김대유(1479-1552) 선생의 자(字)는 천우(天祐)이며, 호(號)는 삼족당(三足堂)이다. 직제학 동창공 김준손(金駿孫)의 아들이고, 탁영 김일손의 장질(長姪)이다.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문인(門人)으로 1507년(중종 2) 정시(庭試)에 장원 급제한 이후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 정언(正言), 칠원현감 등을 지냈다. 기묘사화(己卯史禍) 이후 관직을 사임하고 향리에 돌아와 은거하며 자호(自號)를 “계산(溪山)이 족(足)하고, 풍월(風月)이 족(足)하고, 음아(吟哦)가 족(足)하다”에서 삼족(三足)을 취해서 삼족당(三足堂)이라 하고, 1519년(중종 14) 삼족대(三足臺)를 건립하여 후진을 교육했다.
저서로는 『탁영연보(濯纓年譜)』, 『삼족당 유고(三足堂 遺稿)』가 있다. 묘소는 매전면 금곡리에 있으며 묘재인 ‘유현재(惟賢齋)’가 있다.
세 분 모두 유도의 가르침을 앎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실천적 삶을 지향한 문장과 절행에서 이름 높은 선비였다.
자계서원은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에 자리 잡고 있다. 특히 맑은 하늘에 둥실 뜬 보름달의 풍광은 ‘자계제월(紫溪霽月)’이라 말하는데 청도 8경의 하나이다.
원래 이곳은 탁영(濯纓) 선생이 25세 때인 1488년(성종 19)에 운계정사(雲溪精舍)를 건립하여 수학(修學)하던 곳인데 1518년(중종 13)에 유생(儒生)들이 운계정사를 자계사(紫溪祠)로 개칭하여 탁영 선생을 배향해왔다.
그 뒤 1871년(고종 8)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毁撤)되었다가 유림과 후손들이 협의하여 1924년에 탁영의 14세손인 모계(慕溪) 김용희(金容禧)의 사재로 완전 복원하였다. 1975년도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83호로 지정되었다.


자계서원에는 수많은 불망비(不忘碑)가 있다. ‘탁영선생신도비’, ‘절효선생정려비와 비각(碑閣)’, ‘자계서원원정비’, ‘탁영선생순절500주년추모비’ ‘자계서원사적비’,‘탁영선생문학비’가 그것이다.
그 뜻을 새겨 ‘追慕 濯纓先生’ 이란 시제로 삼가 몇 자 적어보았다.
濯老尊祠拜謁中 탁영선생 모신 존덕사를 배알하는 중
捨生取義感懷鴻 목숨을 버려 의를 취한 감회가 크다
節如烈烈夷齊節 절의는 열열한 백이 숙제와 같고
忠比堂堂死六忠 충심은 당당한 사육신의 충성에 비할만하구나
淚瀉一時京昊暗 (처형될 때) 서울 하늘은 일시에 눈물을 쏟아 어두워졌으며
血流三日紫溪紅 (고향 땅) 자계는 3일 간 붉은 피로 물들였다
董狐直筆千秋赫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직필은 천추에 빛나고
賜額長傳讚不窮 사액으로 전해지는 이름은 찬양에 다함이 없도다
영귀루(詠歸樓)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강당인 보인당(輔仁堂), 사당인 존덕사(尊德祠)등 여러 건물이 한눈에 들어오고 오늘 따라 탁영 선생이 손수 심은 은행나무가 더더욱 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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