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박씨 왕릉(경주)
행전 박영환
2018년 8월 4일, 청도군 박씨 종친회보에 특집으로 담기 위해 경주 지역 신라 왕의 묘소를 찾아 나섰다. 이날 박윤제(청도문화원장), 박종규(전 청도군청 국장)과 함께했다. 이날 무척 더운 날씨였지만 조상의 산소를 찾는 일이니 나름 사명감을 가지고 자취를 정리하며 사진을 찍었다. 마침 박 원장이 드론으로 전체 원경을 잡을 수 있어 현장감 있는 사진을 얻을 수 있었다.
신라의 박씨왕은 열 분인데 시조왕께서 나라를 열었고 또 다른 왕들이 신라를 굳건하게 지켜주셨기에 신라 천년이 튼튼하게 유지할 수 있었으니 우리 조상님들의 공덕은 그 어느 왕에 비유할 수 없는 위대한 업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손하게 절을 올리며 조상의 은덕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편히 쉬시기를 빌었다.


오릉(五陵)
경주시 탑정동 67번지에 위치하며 1969년 사적 제172호로 지정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제1대 박혁거세(朴赫居世), 제2대 남해(南解), 제3대 유리(儒理), 제5대 파사왕(婆娑王) 등 4왕이 모두 담엄사북쪽 사릉원내(曇嚴寺北 蛇陵園內)에 장례를 지낸 기록이 있고,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제1대 박혁거세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에 승천하였다가 7일만에 유체가 5체로 나누어져 땅에 떨어졌다. 나라 사람들이 이를 모아서 장사지내려 하였으나 큰 뱀이 방해하므로 5체를 각각 장사지내서 오릉이 되었고 이로 인해 사릉(蛇陵)이라 하였으니 담엄사 북쪽에 있는 능이 그것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들 가운데 등장하는 담엄사는 현재 오릉의 앞에 있는 홍전문(紅箭門)을 세운 기둥이 당간지주(幢竿支柱)로 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여기에 존재했던 사찰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에 근거해 오릉은 4명의 신라초기 박씨왕들과 박혁거세왕의 왕비인 알영부인(閼英夫人)의 능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 능의 옆에는 재실인 숭덕전(崇德殿)이 있고 앞에는 당간지주를 이용하여 세운 홍전문이 서 있다. 그리고 1호분의 전면에는 후대에 세운 석상, 비석, 장명등, 배례석 등이 있다.

숭덕전(崇德殿)
경주시 탑동 77에 소재하며 신라 시조 박혁거세왕(朴赫居世王)의 제향을 받드는 제전(祭殿)으로 경북문화재자료 제254호이다.
1429년(세종 11)에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0년(선조 33)에 중건하였다. 그뒤 1694년(숙종 20)에 수리하였으며 1723년(경종 3) 묘호를 숭덕전으로 고치고 참봉 3인을 두어 봉수(奉守)하였다. 경내에는 1759년(영조 35)에 세운 혁거세왕과 숭덕전의 내력을 새긴 신도비가 있다.
신라오릉 옆에 있으며 숭덕전을 중심으로 동쪽에 향축실, 전사청이 있고 남쪽 숙경문을 지나면 상현재, 서재 및 영숭문이 있다. 상현재 남서쪽 협문으로 들어가면 숭성각이 있고 영숭문 남쪽으로 조흥문이 있다. 서재 옆 협문을 통과하면 안마당이 있고 남쪽에 고자실 및 포사가 위치하며 북쪽에 추보헌이 있다. 추보헌 뒤쪽으로는 알영각이, 안마당 동쪽에는 동행각이 위치하고 그 뒤로 예빈관이 있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왕비인 알영이 태어난 우물.

지마왕릉(祗摩王陵)
경주시 배동(拜洞) 544-2에 소재하는 신라 제6대 왕 지마왕(祗摩王:재위 112∼134)의 능. 사적 제221호이다. 지마왕은 23년간 재위했다.
봉분의 지름 12m, 높이 3.4m, 면적 9,488㎡. 원형 분구(墳丘)로, 경사를 이용하여 높은 곳에 안치하였으며, 아무 표지가 없고, 능 앞에 혼유석(魂遊石)이 있다.

일성왕릉(慶州逸聖王陵)
경주시 탑동에 있는 신라 제7대 일성이사금의 능. 높이는 5.3m. 사적 제173호. 외형은 둥근봉토분으로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일단 돌려 무덤의 보호석 및 봉토의 흙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였다.
면적은 3만 4,618㎡이다. 무덤의 지름은 15m, 높이는 5.3m이다. 일성왕은 신라 제3대 유리왕(유리이사금)의 맏아들이다. 일지갈문왕(日知葛文王)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왕비는 지소례왕(支所禮王)의 딸 박씨이다.
일성왕은 134년에 즉위하여 154년에 승하하였으며 20년간 재위하면서 농토를 늘리고 제방을 수리하여 농업을 권장하고 민간에서 금·은·옥의 사용을 막아 검소한 생활을 장려하였다.

삼릉(三陵)
경주시 배동 73-1번지에 소재하며 사적 제219호 배리삼릉으로 지정되었다.
경주 배동 삼릉은 경주 남산의 서쪽 기슭에 동서로 3개의 왕릉이 나란히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밑으로부터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등 박씨 3왕의 무덤이라 전하고 있다. 무덤은 모두 원형으로 흙을 쌓아올린 형태를 하고 있다.
내부를 조사한 결과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임을 확인하였다. 무덤에는 돌방 벽면에 병풍을 돌려 세워 놓은 것처럼 동·서 양벽의 일부에 색이 칠해져 있는데, 이것은 본격적인 벽화는 아니지만 벽화가 그려지지 않은 경주의 신라 무덤에서는 처음 발견되는 것으로 주목되는 자료이다. 색은 붉은색, 황색, 백색, 군청색, 감청색으로 되어있고, 12폭으로 되어있다.

<경애왕릉>
경애왕릉은 경주시 배동 산73-1에 있으며 사적 제222호이다. 926년경 축조된 것으로 보호구역은 20만 4930m2이다. 원형 토분(土墳)으로 소박하며 주변에 송림이 울창하다.
억울하게 누명을 쓴 경애왕(景哀王)
경애왕은 신라 제55대왕으로 성은 박(朴), 이름은 위응(魏膺), 시호는 경애(景哀)이다. 신라의 제53대 신덕왕(神德王)의 아들이며 54대 경명왕의 동생으로 재위 4년(924∼927)만에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후백제 견훤에 의해 생을 마감했다.
그런데 경애왕 사후 당신에 대한 평가는 국사에는 관심이 없어 적이 쳐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포석정(鮑石亭)에서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연회나 즐기다가 변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애왕이 정사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당신께서 왕위에 올랐을 때 이미 신라는 국가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울 정도로 크게 쇠약해져 있었는데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당신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왕건에게 사신을 보내는 등 고려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후백제를 견제하려는 정책을 펼쳤다. 925년 겨울에는 고려와 후백제가 서로 인질을 교환하며 화친을 맺자 이를 막으려 했고 그 뒤 고려로 사신을 보내 후백제와 적극적으로 싸울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또 927년(경애왕 4), 중국 후당(後唐)에까지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또 왕건이 군사를 일으켜 후백제를 공격하자 당신은 군사를 파견하여 도우기도 했다. 또 후백제가 금성에 쳐들어올 기미가 보이자 즉시 고려에게 원병을 청해 물리치려 했는데 불행하게도 고려의 원병이 도착하기 전에 견훤이 먼저 침공하여 변을 당했던 것이다.
이처럼 나라 걱정에 노심초사하던 분인데 견훤이 불과 25 킬로미터 거리밖에 되지 않는 이웃 고을 영천까지 몰려온 그런 긴박한 상황에서 아무 분별없이 연회를 즐겼겠는가?
사실이 이러한데도 오로지 포석정에 있었던 것만 부각하여 모든 것을 그쪽으로 재단하여 누명을 씌웠던 것이다.
포석정이 있는 남산은 신라인들이 가장 신성시 하던 곳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이곳은 유흥의 장소가 아니었다. 근래 역사학계에서도 연회를 행하던 장소보다는 의식이 행해졌던 곳이라는 설이 더 힘을 받고 있다. 물론 의식이 끝나고 난 뒤 수행한 왕비, 신하 등과같이 잠시 쉬어가는 공간으로 삼았을 수 있다. 그러나 경애왕의 경우는 그것도 아니다. 지금 적군이 밀려오는 상황도 그러하거니와 그 시기가 음력 11월, 엄동설한인데 무슨 연회를 즐길 수 있겠는가?
경애왕은 애초부터 국가가 백척간두(百尺竿頭) 위기에 처하자 포석사(鮑石祠) 수호신에게 나라를 구해 달라고 빌러 간 것이다. 이런 예는 헌강왕(憲康王) 때도 있었다. 헌강왕도 이곳 포석사에서 남산의 신을 맞아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빌었던 것이다.
흔히 유흥 쪽으로 해석하는 이들은 ‘경애왕 포석정유(景哀王鮑石亭遊)’란 기록 중에서 ‘유(遊)’란 말을 단서로 잡고 있는데 이 ‘유(遊)’는 ‘놀다’란 뜻도 있지만 또 다른 뜻은 ‘가다’이기도 하다. 그러한데도 이 점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굳이 연회에만 방점을 찍어 ‘놀다’로 해석하려는 것은 이 무슨 심사인가. 어쩌면 이것은 신라를 밟고 일어선 승자들의 침공에 대한 정당성을 뒷받침하기 위한 계획된 음모일지 모른다. 하여 경애왕은 그 동안 승자의 역사가 만들어 놓은 덫에 갇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었으니 후손의 입장에서 안타까운 애련의 정에 분한 마음을 금치 못하는 것이다.
경애왕께서 이 세상을 마감한 지도 어느덧 천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이제 당신의 이름만큼이나 슬픈 포석정에의 억울한 누명을 훨훨 벗어 던지고 바르게 평가되어 편히 쉬실 때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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