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사
행전 박영환

2016년 3월 29일(월), 길상사를 찾았다. 이곳은 특이하게도 요정인 대원각에서 불법의 향기로운 도량으로 바뀐 곳이다.
서울 지리에 별로 밝지 못하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해도 별로 어려움없이 올 수 있었다. 지하철 4호선을 타고 한성대역에 내려 6번 출구를 나와서 2번 마을 버스를 이용하니 절문 앞에 내려주었다.
길상사는 무소유의 도량이다. 길상화(吉祥華, 본명 김영한) 보살이 1987년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생애의 아름다운 회향을 생각하고 질곡의 생애 속에 평생 모은 7 천 여평의 대원각을 절터로 만들어 주기를 발원하고 아낌없이 무주상보시한 것이다.
그분은 "나 죽으면 화장해서 눈이 많이 내리는 날, 길상헌 뒤뜰에 뿌려주시오" 라는 유언을 남기고 1999년 11월 육신의 옷을 벗었다. 한 줌의 재가 뿌려진 그곳에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의 조그마한 공덕비와 소박한 사당이 남아 있을 뿐이다.
법정스님은 이 순수하고 고귀한 보살의 마음을 받들어 1995년 6월 13일 송광사의 말사인 '대법사'로 등록한 후 1997년 길상사(송광사의 옛 이름)로 사찰명을 바꾸어 '맑고 향기롭게 근본 도량'으로 창건하였다.
법정스님은 법문에서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이란 말을 들을 때마다 몸과 마음에 전율 같은 것을 느낍니다. 과연 제 자신이 맑고 향기롭게 살고 있는가를 스스로 묻게 됩니다. 맑음은 개인의 청정을, 향기로움은 그 청정의 사회적 메아리를 뜻합니다. '맑고 향기롭게' 라는 이 말은 길상사가 존속하는
한 인연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화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스님은 병이 깊어진 뒤에도 침상에서 예불을 거르지 않았으며 금생에 저지른 허물은 생사를 넘어 참회할 것이다.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는 말씀을 남긴 뒤, 2010년 3월 11일 길상사에서 입적했다. 그 때 유언을 남겨 관도 없이 훌훌히 떠나신 것은 유명하다. 이는 마지막까지 무소유의 삶을 실천한 것이다.
길상사에 머무는 동안 '인연'이란 화두를 계속 뇌이었다. '과연 인연의 힘은 어디까지인가'
김영한(金英韓, 1916 - 1999) 님은 본명 대신에 진향(眞香), 자야(子夜), 길상화(吉祥華)란 이름으로 살았다.
진향은 기울어진 가정 사정 때문에 16세에 금하(禁下) 하규일 문하에 기생으로 입문하면서 받은 기명(妓名)이요, 자야는 20대에 열렬하게 사랑했던 천재 시인 백석이 붙여 준 애칭이요, 길상화는 80대에 인생 말년을 정리하면서 법정스님으로부터 염주 한 벌과 함께 받은 불명(佛名) 이다. 이 이름들이 바로 그가 살아온 인생을 함축하여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이 이름들은 모두 인생의 구비마다 당신을 구원하는 이름인 동시에 아픔이고 아픔인 동시에 구원이었을 것 같다.
그녀는 한국 정악계의 대부였던 금하 하규일 선생의 지도를 받아 여창 가곡과 궁중무 등 가무의 명인이 되어 조선 권번 기생으로 있던 중, 1936년 가을 우연히 함경남도 함흥에서 백석 시인을 만나 숙명적 사랑을 하게 된다. 그 때 그녀는 스물 두 살이었고 백석은 스물 여섯 살이었다. 백석은 그녀에게 '자야'란 애칭을 붙여주었는데 이는 당나라 시선인 이백의 '子夜吳歌'에서 따온 것이다. '자야오가'란 중국 진 나라때 오란 곳에 살던 여인이 전쟁에 나간 남편을 그리워하는 내용인데 이를 이백이 대신 지어준 것이다. 그 노래는 춘하추동 사시가로 짜여져 있는데 내용 중 특히 "장안에 한 조각 달, 집집마다 다듬이질 소리, 가을 바람 불어 그치지 않으니, 이는 모두 옥문관의 정이여, 어느 날에나 오랑캐를 평정하고 낭군은 원정에서 돌아오려나.' 대목이 눈에 뜨인다.
당시 사회적 관습으로 보아 두 사람의 정식 결혼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녀도 '빠져 들다'란 글에서 "그대가 자야로 부르면서 저의 본명 김영한은 사라지고 '자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운명은 그대의 '숨겨놓은 애인'은 될 수 있을지언정 처는 될 수 없었습니다." 라고 서술하고 있다.
백석 역시 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면서도 그녀와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그녀 자신도 속마음은 아니지만 기생의 치마폭을 벗어나 결혼을 하라고 권유했고 실제 부모의 성화에 쫓겨 두 번이나 장가를 들었지만 다시 자야에게 돌아오기도 했다. 그러나 끝내 백석도 관습의 벽을 뚫지 못하고 만주로 떠난 뒤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것이 1940년이었다.
해방 이후 그녀는 요정 '대원각'을 인수하여 재산도 늘이고 명성도 올렸지만 마음 한 구석에 허전한 마음은 지울 수 없었다.
마침내 1987년 대원각을 불교계에 기증함과 동시 '백석문학상' 제정을 위해 2억원을 기탁했다. 그녀는 한낱 기생에 지나지 않은 사람에게 남편으로서의 사랑을 베풀어 주셨기에 그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할 따름이라고 하면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다.
대원각을 길상사에 보시할 때 백억에 이르는 재산인데 아깝지 않느냐고 했을 때 백억도 백석 시인의 시 한줄만 못하다고 했으니 백석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는지를 알 수 있다. 언제 백석 시인이 가장 보고 싶었느냐고 기자가 물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때가 따로 있겠느냐고 했다.
그녀는 고작 4년 정도를 같이 생활했을 뿐 60년이란 긴 이별의 세월을 그리워하며 살았다. '子夜'란 이름 속에 어둠을 상징 하는 '夜'가 들어있다. 이는 이들의 사랑이 순탄치 못할 것을 은연 중 암시한 것이지도 모르겠다.
백석과 기생 자야의 짧은 사랑 긴 여운은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당나귀'라는 시에 잘 나타나 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 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 푹푹 눈이 내린다.
나타샤를 사랑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즈녁히 와서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서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내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두 분의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문득 '비에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란 어느 시인의 싯구가 생각이 난다.
이제 길상사 하얀 눈이 쌓인 언덕에 길상화란 이름으로 잠이 든 님이시여, 맑고 향기로운 이 도량의 또다른 고운 향이 되어 극락왕생 하소서.









법정스님의 유품과 영정을 모신 진영각


법정스님의 유골을 모신 곳











길상화 님의 공덕비와 사당

백설
행전 박영환
길상사에 눈이 내린다
내리는 눈은
김영한이란 본명 위에 눌러 쓴
그녀의 또 다른 이름들을 조용히 덮는다
연필 자국이 너무 진한 것일까
지우개도 버거운 바람 한 줄기 음표를 만든다
열여섯 살 기생 진향의 숨소리는 가얏고 위에서 서성이고
스물두 살 자야는 밟히지 않는 발자국 위에 백석의 시를 풀어놓을 때
80대 노 보살 길상화가 빈집의 뜨락에 무소유를 뇌인다
진정한 사랑, 그 순수하고 위대한 진실을 본다
백억 재산도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고 했던가
4년의 짧은 사랑, 60년의 긴 이별
언제 가장 그리웠느냐고 누군가 물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는데 때가 따로 있느냐는 씁쓸한 반문
간절한 그리움은 산도 강도 막지 못했다
한 줌의 재로 굴곡의 세월 육신의 옷을 벗은 님이시여
인연 따라 얻은 이름 인연 따라 내려놓으니
이제 사방은 순백의 세상
맑고 고운 향으로 극락왕생 하소서.







길상사 경내 도서관에서 법정스님의 '맑고 향기롭게'를 읽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