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읍 원정리(3) 석동서원과 모선재
청도읍 원정리(3) 석동서원과 모선재/ 행전 박영환
2016년 11월 28일, 운산리를 방문하고 난 뒤 곰티재 쪽에서 국도 20호선을 타고 내려오다가 좌측에 있는 원정리에 들어가 죽산박씨 재사인 죽림재를 둘러보고 이어서 옛날 만석꾼집을 방문한 뒤, 다시 석동서원과 모선재를 찾았다. 경로당에 들어가 위치를 확인했다. 마침 나오는 길에 석동서원 재령이씨 집안의 아주머니도 만나고 일직 손씨 집안의 어느 분도 만나서 설명도 들을 수 있었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당시 원당동 일부와 정촌동을 병합하여 원정동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곳은 정촌과 원당, 원대밭, 광대정, 통안, 흑석, 모강, 능곡 등의 자연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샘이 있는 마을이라고 정촌(井村), 오래된 마을이라는 뜻의 원당(元堂), 넓은 들 가운데 정자가 있어 넓고 큰 정자라 해서 광대정, 통처럼 생긴 마을이라고 해서 통안, 선사 시대 유물인 고인돌이 많기 때문에 흑석. 1600년대에 옮겨진 남쪽 봉수대가 있는 골짜기인 능곡. 모퉁이에 강과 마주했기 때문에 모강이란 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 나름대로 특색을 가지고 있는 유서 깊은 마을이나 청도읍이란 지역적 특성상 도회지적인 요소를 수용하고 있다.
석동서원(石洞書院)
◯ 관리문중: 재령 이씨(載寧 李氏) 문헌공파
◯ 소재지: 청도군 청도읍 원정리 흑석마을 뒤편 산기슭 637번지
◯ 건물구조: 전면에 세운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팔작지붕 겹처마 석동서원(정면5칸, 측면1칸)이 자리 잡고 있다. 재사보호를 위해 전면에 유리창을 달았다. 뒤편 높은 축대 위에 사당인 맞배지붕 3칸의 현충사(顯忠祠)가 있으며, 우측에 따로 중문 하나가 더 설치되어 있다. 석축 낮은 담장을 둘러 시야가 넓어 전망이 좋다. 서원 앞에 큰 은행나무가 있어 운치를 더하며 이운용장군 영정 및 식성군 문적에 대한 안내판이 있다.
◯ 배향인물
식성군 이운룡(息城君 李雲龍:1562~1610)
본관은 재령이며 호는 동계(東溪)이다. 1585년 무과에 급제한 후 1592년 임진왜란 발발시 옥포만호로서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원군을 청해 임진왜란 최초의 승리를 거둔 옥포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1604년에는 효충장의 선무공신 절충장군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이운룡에게 내리는 교서로 선무공신 3등으로 책훈되었다. 1607년 6월 까지 2년 동안 제7대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하였으며 이 기간 동안 어명에 따라 통영에 충렬사를 건립하였고 거영일기(居營日記)와 계본등록(啓本謄錄)등의 문적을 만들었으며 가선대부 식성군에 책봉되었다. 이후 함경도 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1610년 전상후유증으로 별세하고 사후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제수되었다. 이운룡 장군 영정(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89호)은 가로 146cm 세로178cm의 단호흉배(單虎胸背), 학정금대(鶴頂金帶)를 착용한 모습으로 조선중기 공신도상(功臣圖像)의 전형적인 형식을 예시해주는 가작이다.
거영일기는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서 기록한 약 15개월간의 일기로 일기 내용 중에는 병영예식, 일상생활, 군 장비, 훈련 상황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계본등록은 건(乾) 곤(坤) 2권으로 되어 있는데 수군통제사로 국왕께 올렸던 장계 138건이 기록되어 있고 수군의 작전방략과 운영실태 등이 기록되어 있다. (거영일기와 계본등록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142-1호로 지정)
◯ 연혁: 1870년에 건축했으며, 처음에는 식성군 이운룡의 진영정을 봉안하는 영정각이었으나 1983년 석동서원으로 개칭되었다.
원래 장군의 출생지인 매전면 온막리에 상충사를 건립하여 봉안해오던 영정을 1919년 개모하여 효충사에 봉안하고 진영정은 2년 후인 1921년 이곳에 봉안하고 춘추로 사림에서 향사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수많은 충신열사들이 상훈을 받고 많은 영정이 나라에서 내려졌으나 무관의 영정으로는 장군의 영정만 그 진본이 남아 있다.
장군석 - 지금은 이운룡 장군의 산소가 경남 의령에 있지만 처음에는 청도군 매전면 동창 법귀산에 있었다. 산소 이장시 장군석은 가져 가지 않아 매몰되어 있었는데 뒤에 이를 알고 서원 내에 옮겨온 것이다. 앞에 있는 것은 비의 받침인 비단이다.(원정 출생이며 현재 경산에 살고 있는 방손 이균열 님의 증언)
사당인 충현사
석동서원에서 내려다 본 마을 모습
은행이 많이 떨어져 만추의 정취를 느끼게한다. 어느 할머니가 줍고 있었다.
다음 찾아간 곳이 모선재이다. 원정아파트 뒤편에 있었다.
모선재(慕先齋)
◯관리문중: 일직 손씨 청도파
◯소재지: 청도군 청도읍 원정리 493-5(원정리 중앙로 120-30)
아파트 뒤편 산기슭에 웅장하게 자리잡고 있다. 시야가 넓어 청도읍이 잘 조망되는 곳이다.
◯건물구조: 전면에 세운 3칸 규모의 낙지문(樂志門) 이름이 걸린 솟을 대문(출입문, 수납공간1, 화장실1)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높은 축대 위에 목조와가 팔작지붕 정면 5칸 측면 3칸 재사(온돌방 3칸, 대청 2칸, 중당협실형)이 있다. ‘모선재 이건기’, ‘모선재 기’, ‘원운’, ‘경제’, ‘경차’ 등 현판이 대청에 걸려 있다. 축대 밑 좌측 측면에 3칸 규모의 하당이 있으며 마당에는 자갈을 깔았으며 높은 석축담장을 둘렀다.
◯배향인물
1)격재(格齋) 손조서(孫肇瑞)
본관은 일직(一直). 자는 인보(引甫), 호는 면재(勉齋)·격재(格齋). 손득수(孫得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손영유(孫永裕)이고, 아버지는 감찰을 지낸 손관(孫寬)이며, 어머니는 김흡(金翕)의 딸이다.
1432년(세종 14)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435년(세종 17) 식년 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였다. 그 해 예문관검열을 거쳐 집현전에 보직되었으며, 지봉산군사(知鳳山郡事)가 되었다.
1451년(문종 1)에 병조정랑을 지냈다. 1456년(세조 2)에 단종의 복위를 꾀하던 성삼문(成三問) 등이 처형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은둔, 호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은 단종 절의신이다. 저서로는 『격재집(格齋集)』이 있고 대구의 청호서원(靑湖書院)에 제향되고 있다.
2) 모강(慕崗) 손순욱(孫筍彧)
격재의 이손(二孫)으로 참봉을 지냈으며 16세기 초에 밀양 용평에서 청도 원정리 모강(慕崗)에 정착 시거한 입청도조(入淸道祖)이다.
◯연혁: 2000년에 새로 건축했다.
이곳도 다른 재실처럼 문이 잠겨 있을까 걱정을 했는데 마침 인적기가 있어 문을 두드렸더니 외국인 며느리 한 분이 문을 열어주었다. 잠시, 약간 어색했지만 가만히 생각하니 위치가 아파트와 같이 있고 외국인 며느리가 관리를 하고... 이것도 앞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할 모습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당
모선재에서 내려다 본 마을 모습(상, 하)
원정리(元井里)
디지털 청도문화대전에 소개된 ‘원정리’를 발췌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용각산 지맥이 흘러 내려와 석을산을 이루고 남진하여 유천에 이르는 중간에 형성된 마을이다. 골짜기를 따라 길쭉하게 자리 잡고 있으며, 마을은 동서로 트여 있고 남북은 산으로 막혀 있다. 원정천이 운산리에서 발원하여 부야리와 원정리를 거쳐 청도천에 이른다.
동쪽은 청도읍 부야리, 서쪽은 청도읍 송읍리·고수리, 남쪽은 청도읍 구미리·월곡리·매전면 송원리, 북쪽은 청도읍 무등리·안인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조선 시대에 내종도면이었다가 다시 용산면으로 바뀌었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원당동 일부와 정촌동을 병합하여 원정동이라 하고 대성면에 편입하였다. 1940년 대성면이 청도면으로 개명되면서 청도면 원정동이 되었으며, 1947년 청도면이 청도읍으로 승격되면서 청도읍 원정리가 되었다. 1988년 원정동에서 원정리로 개명하였다.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당시 원당동 일부와 정촌동을 병합하여 원정동이라 하였다.
행정리는 원정 1리부터 원정 3리까지 있으며 정촌과 원당, 원대밭, 광대정, 통안, 흑석, 모강, 능곡 등의 자연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정촌(井村)은 샘이 있는 마을이라 해서 마을 이름을 정촌이라고 했다고 한다. 마을 가운데에 가뭄과 장마에 변함없이 물이 솟아나는 샘이 있어서 주변 마을 사람들이 이 샘을 이용하였다. 원당(元堂)은 정촌보다는 높은 위치에 자리한 마을이며, 옛날부터 사람이 거주하였으며 이 마을에서 오래되었다고 해서 원당이라고 한다.
광대정 마을은 원당보다 아랫마을이나 지금은 구분이 별로 되지 않는 동네이다. 넓은 들 가운데 정자가 있어 넓고 큰 정자라 해서 광대정이라고 하며 이곳에서 여러 가지 행사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통안은 윗통안과 아랫통안으로 불리고 있는데 윗통안은 통처럼 생긴 마을이라고 해서 통안이라고 했고, 아랫통안은 마을 앞을 지나가는 산골 물을 막기 위해서 돌로 만든 둑을 쌓았는데, 둑이 높아 통같이 생겨서 통안이라고 했다고 한다.
흑석은 선사 시대 유물인 고인돌이 늘어져 있기 때문에 흑석이다. 지금은 경지 정리와 도로 확장, 거주지 확대 등 생활에 장애가 된다고 해서 없애버린 것이 많지만 아직도 9기의 고인들이 흩어져 있다. 능곡은 1600년대에 옮겨진 남쪽 봉수대가 있는 골짜기이다. 모강은 원정천과 청도천이 마주치는 곳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지금은 바로 강과는 인접하지 않으나 모퉁이에 강과 마주했기 때문에 모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원정리에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것은 고인돌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으며 윗통안에는 언제 있었는지 알 수 없는 절터가 남아 있고 고려 때의 무덤이 있으며 일제강점기에 수많은 토기를 도굴해 갔다고 한다. 아랫통안 끝부분 모퉁이 돌에 계성(桂城)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으나 무엇 때문에 새겨놓은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장연 노씨의 중시조 노정승의 묘가 있는 모강은 노정승들이라고 한다.
*참고자료
ㅇ청도문화(청도문화원 2001)
ㅇ디지털 청도문화대전
ㅇ청도군지(1991, 청도군)
ㅇ도주지(1958, 김석봉 편)
ㅇ택리지(1978, 최장영 외)
ㅇ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면담
ㅇ재령 이씨 후손 및 일직 손씨 후손 다수